자그니 칼럼니스트 – SK hynix Newsroom 'SK하이닉스 뉴스룸'은 SK하이닉스의 다양한 소식과 반도체 시장의 변화하는 트렌드를 전달합니다 Wed, 26 Feb 2025 07:49:53 +0000 ko-KR hourly 1 https://wordpress.org/?v=6.7.1 https://skhynix-prd-data.s3.ap-northeast-2.amazonaws.com/wp-content/uploads/2024/12/ico_favi-150x150.png 자그니 칼럼니스트 – SK hynix Newsroom 32 32 마블 캐릭터의 초능력이 현실로? 반도체가 실현하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spiderman-no-way-home/ /spiderman-no-way-home/#respond Thu, 24 Feb 2022 14:55:00 +0000 http://localhost:8080/spiderman-no-way-home/ ※ 스포일러 있습니다.

지난 12월 개봉한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세 번째 스파이더맨 영화다.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 아이언맨이 사라진 세상을 살아가는 주인공 피터 파커(톰 홀랜드 분)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번 작에서는 정체가 탄로 난 피터가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멀티버스(Multiverse, 멀티(Multi)와 우주(Universe)의 합성어로, 다중우주를 의미)가 열리게 되고, 이를 통해 역대 빌런들이 한자리에 소환되며 위기를 맞는 이야기가 그려진다.

역대 스파이더맨 그리고 그들이 맞서 싸워 온 각기 다른 초능력을 지닌 빌런들의 매력을 한눈에 볼 수 있었던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과학기술도 발전해온 만큼, 궁금증이 든다. ‘이들의 초능력을 현실에서도 구현할 수 있지 않을까?’ 그 해답을 ‘반도체’를 통해 찾아봤다.

아이언맨의 유산을 잃어버린 스파이더맨, 역대 최악의 빌런들을 만나다

▲ 영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스틸컷(출처: 소니픽쳐스 코리아)

홀로그램과 드론을 이용해 세상을 속인 가짜 히어로, 미스테리오를 사람들은 진짜 영웅으로 믿고 있었다. 이 때문에 피터는 처음부터 곤경에 처한다. 그가 스파이더맨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미스테리오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쓴 것.

미스테리오의 팬들의 비난이 쏟아지고, 정부기관의 수사 과정에서 그의 뒤를 받쳐주던 스타크 인더스트리까지 조사를 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아이언 스파이더 슈트에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인공지능(AI) 시스템을 연결해 사용하던 일부 기능을 잃고, 토니 스타크에게 물려받은 최첨단 증강현실(AR) 안경인 이디스(EDITH)마저 압수당한다.

▲ 영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스틸컷(출처: 소니픽쳐스 코리아)

이로 인해 두 가지 일이 벌어졌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하나는 빌런과 싸울 때, AI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됐다. 대신 목에 스마트폰을 걸고 영상통화로 시야를 공유하며 친구들의 도움을 받는데, 그리 큰 도움을 받지는 못한다. 다른 하나는 빌런을 찾을 때 안면인식 기술을 갖춘 AI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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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스틸컷(출처: 소니픽쳐스 코리아)

뭐, 여기까진 괜찮다. 타노스가 사라진 이후, 나름 평화로운 시대가 찾아왔으니까. 진짜 문제는 이런 소동으로 인해 대학에서 피터와 친한 친구들의 입학을 거부한 것. 시끄러운 문제를 일으킬 것 같으니 받아주지 않은 것이다.

이에 피터는 닥터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배치 분)를 찾아가 마법으로 ‘피터 파커가 스파이더맨’이라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 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시전 도중 이런저런 조건을 너무 많이 달아버린 탓에 마법은 실패하고, 역효과로 멀티버스에서 ‘피터 파커가 스파이더맨’이라는 사실을 아는 존재들이 이 세계에 찾아오게 된다.

문제는 넘어온 대부분이 그들이 있던 세계에서 큰 문제를 일으킨 빌런들이라는 점이다. 심지어 그린 고블린(윌리엄 데포 분), 닥터 옥토퍼스(알프레드 몰리나 분), 샌드맨(토머스 헤이든 처치 분), 리저드(리스 이판 분), 일렉트로(제이미 폭스 분) 등 한 명만 등장해도 큰 문제가 될 최악의 빌런들이 한꺼번에 넘어왔다.

화가 난 닥터 스트레인지의 명령으로 피터는 이 세계에 찾아온 빌런들을 다 잡아 오지만, 돌려보내려고 하니 모두 돌아가면 곧 죽을 사람들이다. 그들이 불쌍해진 피터는 닥터 스트레인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치료한 다음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기로 마음먹는다. 계획은 근사했지만, 악당을 우습게 봤다. 닥터 옥토퍼스를 뺀 다른 이들은 치료를 거부하고 도망간다.

아이언맨의 유산을 잃은 스파이더맨에게 역대 최악의 빌런들을 상대해야 하는 위기가 찾아왔다. 피터가 친구들, 뜻밖의 조력자들과 함께 이 위기를 해결하는 과정이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의 메인 스토리다.

히어로와 같은 위험 감지 능력으로 우리를 지켜주다… 현실에 구현된 ‘스파이더 센스’

스토리의 재미도 뛰어나지만, 역대 최악의 빌런들이 집결한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서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히어로와 빌런들이 보유한 초능력들이다. 먼저 히어로의 능력부터 살펴보자.

악당들이 탈출하기 전, 피터는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직감한다.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능력이 바로 ‘스파이더 센스(Spider Sense, 어떤 종류의 위험이든 사전에 알려주는 스파이더맨의 초인적인 육감)’다. 피터는 이 스파이더 센스로, 본래의 선한 인격자(노스 오브먼으로 불린다)로 있던 그린 고블린이 다시 자신의 악한 인격을 되찾은 걸 바로 알아챘다.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초능력 같지만, 이와 비슷한 힘을 가져보겠다고 시도한 사람이 있다. 미국 일리노이 대학의 전자 시각화 연구소 연구팀이다. 지난 2013년 제4회 증강인간국제회의에서 발표한 ‘스파이더 센스’가 그렇게 만들어진 제품이다. 시각이나 청각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제품을 고민하다 팔, 다리, 가슴, 이마 같은 신체 부위에 13개의 센서 모듈을 달았다. 각 모듈에는 최대 5m 정도 거리에서 물체를 감지하는 초음파 센서와, 센서에서 파악한 내용을 몸에 전달하는 장치가 달려있다. 물체에 가까이 다가가면 압력이 커지고, 멀어지면 압력이 약해지는 식으로, 근처에 무언가 있다는 사실을 착용한 사람에게 알려준다.

이렇듯 현실에서 스파이더 센스가 필요한 건 히어로가 아닌, 장애가 있는 사람이다. 센서 반도체가 활약하는 분야이기도 하다. 이 아이디어는 최근 CES2022에서 발표된, 스위스의 한 스타트업이 만든 바이패드(Biped) 같은 제품으로 이어졌다. 바이패드는 어깨에 걸 수 있는 3D 카메라이자 AI 도우미로, 자율주행을 위해 연구되던 기술을 시각장애인을 위해 응용했다. 카메라로 주변 상황을 확인한 다음, 골전도 이어폰을 통해 필요한 정보를 들려준다. 아직 시제품 제작 단계지만, 제작사는 앞으로 바이패드가 시각장애인의 지팡이나 안내견을 대신할 수 있는 기기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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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더 센스 같은 위험 감지 기술이 가장 적극적으로 쓰이는 분야는 단연 차량에 장착되는 보행자/차량 감지 기술이다. 자동 긴급 제동 시스템(AEB)라고도 한다. 카메라와 레이다 센서를 활용해 운전 중 장애물이 갑자기 나타났을 때, 운전자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경우 대신 브레이크를 밟아준다. 이미 많은 차량에 기본 사양으로 탑재돼 있다. 사람을 보호하고 사고를 내지 않기 위해 쓰이니, 이러한 기술을 구현하는 반도체가 현실의 슈퍼히어로인 셈이다.

그린 고블린의 ‘호버보드’, 닥터 옥토퍼스의 ‘로봇 팔’도 이미 구현 중

스파이더 센스는 강력하지만, 가까운 이의 죽음은 막지 못했다. 빌런들이 탈출하는 과정에서 피터를 돌봐주던 숙모 메이 파커가 그린 고블린에게 살해당하고 만 것. 철없던 소원에서 시작한 여러 사건으로 인해, 피터는 큰 대가를 치렀다. 대신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두 명의 스파이더맨(토비 맥과이어 분, 앤드류 가필드 분)을 만난다. 그리고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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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스틸컷(출처: 소니픽쳐스 코리아)

스파이더맨의 숙적 그린 고블린은 영화에 등장할 때마다 스파이더맨에게 가장 큰 시련을 선물한다. 현실에서도 그와 같은 빌런이 존재할 수 있을까?

예전이라면 ‘그럴 수 없다’고 단언했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난해 미국 뉴욕에 그린 고블린처럼 호버보드(Hoverboard, 전동 바퀴가 달린 보드)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남자가 등장했다. 호버보드 전문 유튜버 헌터 코왈드(Hunter Kowald)였다. ▶ 관련 영상 ‘Real Green Goblin’ Flew His Hovercraft Through Times Square’ 바로 가기

프랑스 스타트업 자파타(Zapata)에서 만든 ‘플라이 보드 에어(Fly board Air)’라는 제품도 그린 고블린의 호버보드와 유사하다. 이 제품은 제트엔진을 이용해 하늘을 날 수 있는 보드로, 비행시간은 10분 정도로 짧지만 최고 속도 150km, 최대 고도 3,000m의 성능을 자랑한다. 돈이 많고 위험을 감수할 수 있다면 보드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는 세상에 우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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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스틸컷(출처: 소니픽쳐스 코리아)

닥터 옥토퍼스는 어떨까? 촉수 형태의 로봇 팔은 너무 흉측해 만들어지지 않겠지만, 인간 능력을 확장하기 위해 웨어러블(Wearable) 형태로 세 번째 로봇 팔을 다는 연구는 조금씩 이뤄지고 있다.

실제 사례로는 캐나다 쉐브룩 대학에서 개발 중인 웨어러블 로봇 팔이 있다. 과일 따기나 페인트칠 같은 일을 더 편하게 할 수 있게 돕는 로봇이다. 미국 카네기 멜런대학에서는 배낭처럼 짊어질 수 있는 로봇팔을 개발했다. 이 팔을 이용하면 천장에 어떤 장치를 부착하는 일과 같이 혼자 하기 조금 어려운 일을 쉽게 할 수 있다. ▶ 관련 영상 ‘Supernumerary 3DOF Robotic Arm’ 바로 가기

영화 속 상상력을 현실로 구현하는 열쇠는 ‘반도체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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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진짜 놀라운 순간은 피터가 토니 스타크가 만든 패브리케이터 장비를 사용해 닥터 옥토퍼스의 타버린 AI 반도체 칩을 복구하는 장면이다. 닥터 옥토퍼스가 자기 몸에 뇌-기계 인터페이스(Brain Machine Interface, 이하 BMI) 칩을 장착해 촉수 로봇을 제어하는 것도 신기하지만(조지아-켄트-연세대 공동 연구팀은 뇌파를 이용해 휠체어나 로봇팔을 무선 제어하는 웨어러블 BMI 시스템을 개발한 적이 있다), 피터는 반도체 칩을 몇 시간 안에 스스로 다시 만들어냈다.

이를 가능케 한 기술은 아마도 FPGA(Field Programmable Gate Array. 이미 설계된 하드웨어를 반도체로 생산하기 직전 최종적으로 하드웨어의 동작 및 성능을 검증하기 위해 제작하는 중간 개발물 형태의 집적 회로)일 가능성이 크다. 칩 설계를 바꿀 수 있는 반도체를 이용해 짧은 시간에 필요한 소프트웨어를 짜 넣어 완성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설득력 있다. 이를 정말 피터 홀로 해냈다면, 노먼 오스본이 피터를 “우리 세계로 스카우트하고 싶다”고 칭찬한 것이 결코 빈말은 아니다.

물론 개인이 반도체 칩을 제작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에 사는 22살 청년 샘 제로프(Sam Zeloof)는 취미로 고등학교 때부터 차고에서 반도체 칩을 만들어 유명해졌다. 제작 기술은 1960~70년대 특허와 교과서에서 얻었고, 경매 사이트에 올라온 70~80년대 구형 칩 제조 장비를 사서 부품으로 이용했다. 이런 것이 가능할지 의문이 들 수 있겠지만, 실제로 성공했다. 현재 1,200개의 트랜지스터가 탑재된 칩을 제작하는 단계까지 이르렀고, 곧 2,200개의 트랜지스터가 탑재된 칩을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다.

가족도, 친구도, AI 기술도 모두 잃어버린 스파이더맨, 이제 어찌 살아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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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스틸컷(출처: 소니픽쳐스 코리아)

피터는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다른 스파이더맨들의 도움을 받아 이 세계로 넘어온 모든 빌런을 치료하고, 원래 있던 세계로 돌려보내는 데 성공한다. 대가는 작지 않았다. 처음엔 ‘피터 파커=스파이더맨’이라는 기억을 지우길 원했다면, 이젠 ‘피터 파커’란 존재를 모두의 기억에서 지워야 했다.

다행히 사건은 해결됐고 스파이더맨은 계속 스파이더맨으로 남았지만, 피터에겐 돌아갈 집이 사라졌다. 아무도 자기를 모르는 세계. 가족은 없고, 친한 친구조차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세계. 그곳에서 피터는 이방인으로 사는 삶을 시작한다. 이제껏 사용했던 모든 기술도 사라지고, 남은 건 수제 스파이더맨 복장과 친구가 선물로 준 레고뿐이다. 하지만 이제 안다. 슈트가 없어도 자신은 스파이더맨이고,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그런 결심을 하고 손에 든 스마트폰에는 경찰 무선을 스캔해서 들을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이하 앱)이 보인다. 실제로 존재하는 앱이다. 미국에선 경찰이나 소방 무전이 일차적으로 공개 주파수로 전송되기 때문에, 원하는 사람은 장비만 있으면 들을 수 있다. 이를 취미 삼아 전문적으로 듣는 사람도 많아서, 이렇게 얻은 정보를 정리해 제공하는 ‘시티즌(Citizen)’이란 앱도 있다.

스파이더맨은 이제 평범한 시민과 다를 바 없는 위치에서 다시 시작한다. 그래도 최소한 스마트폰을 통해 어디서 어떤 범죄가 일어나고 있는지는 알 수 있다. 가족도, 친구도, 첨단 AI 기술도 모두 잃어버렸지만, 히어로로서의 삶은 남아있다. 그리고 여전히 인류가 이룩한 기술은 그의 곁에서 그에게 빌런과 다시 싸울 힘을 보태주고 있다. 그를 걱정하면서도 여전히 그의 활약을 기대하는 팬들이 있는 한, 그는 또 다른 영화로 우리 곁에 찾아올 것이다.

※ 본 칼럼은 반도체/ICT에 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외부 전문가 칼럼으로, SK하이닉스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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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가 없는 SF 판타지, ‘듄(Dune)’ /movie-dune/ /movie-dune/#respond Wed, 08 Dec 2021 14:55:00 +0000 http://localhost:8080/movie-dune/ ※ 스포일러 있습니다.

Dune Poster

▲영화 <듄(Dune)> 스틸컷(사진 제공: 워너브라더스코리아)

듄(Dune)은 1965년 출간 이후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SF소설 듄(Dune) 시리즈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다. 먼 미래, 초능력을 갖고 태어난 주인공이 가문을 몰락하게 만든 적대 가문과 황제의 괴롭힘에 맞서 도망치고, 싸우고, 새로운 황제가 되는 이야기의 반쪽을 담았다(후편은 2023년 개봉 예정). 배경은 10901년의 우주로, 스파이스 멜란지라는 값비싼 광물을 우주에서 유일하게 채취할 수 있는 행성 아라키스가 주 무대다. 주인공 폴 아트레이데스(티모시 샬라메 분)가 속한 아트레이데스 가문이 황제의 명을 받아 갑자기 아라키스를 통치하러 가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듄, 인공지능과의 전쟁 끝에 컴퓨터가 사라진 미래

영화를 보다 보면,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게 된다. 분명 행성 간 여행이 가능할 정도로 기술이 고도로 발전한 시대인데, 오히려 후퇴한 듯 보인다. 최첨단 기술을 받아들인 중세시대, 혹은 깨끗하게 멸망하고 일부 기술만 살아남은 지구와 같다고 해야 할까. 먼저 디스플레이 장치가 보이지 않는다. 영상을 보여주며 교육하는 기기는 있지만, 화면이 아닌 홀로그램을 이용한다. 비행기를 조종할 때도 구식 비행기처럼 아날로그 표시 장치에 의존한다. 개인 통신기는 목 뒤에 붙어 있고, 적의 침략도 눈으로 확인한다. 로봇 같은 기기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세계는 컴퓨터가 없는 세계다.

듄 시리즈 팬들이 만든 듄 위키는 이 세계가 이렇게 된 이유를 ‘버틀레리안 지하드’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과거 인류 문명은 끝없이 번창했다. 빛보다 빠르게 여행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해 우주로 진출했으며, 여러 행성에 나눠 살게 된다. 대가가 없었던 건 아니다. 당시 인류를 통제했던 구 제국은 행성 관리를 인공지능과 로봇에게 맡겼다. 인공지능(AI)은 스스로 의지를 갖고 성장해, 결국 생각하는 기계와 기계에 결합한 인간이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 다른 인간은 기계의 노예가 됐다. 다행히 다른 행성에 진출해 노예가 되지 않은 인간들이 연합해 기계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이 길었던 전쟁을 버틀레리안 지하드라고 부른다.

전쟁은 인간의 승리로 끝났지만, 생각하는 기계에 대한 깊은 혐오를 남겼다. 아예 종교 계명으로 “너희는 인간 마음과 비슷한 기계를 만들지 말라(Thou shalt not make a machine in the likeness of a human mind)”고 남겨 놓을 정도다. 그래서 이 세계에는 로봇이 없고, AI도 없으며, 디지털 정보를 현실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디스플레이 장치가 다 사라져 버렸다. 심지어 계산기도 없다. 고도의 첨단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걸 자동으로 움직이는 일은 끔찍하게 증오하는 사회다. 이것이 듄이 가진 특별한 매력이다. 우리는 듄을 통해 인류가 기술을 다르게 썼을 때, 어떤 형태로 문명이 발전하게 될지 살짝 맛볼 수 있다.

멘타트가 컴퓨터를 대신하는 세계에도 ‘반도체’의 역할은 있다

이쯤에서 한 가지 궁금증이 든다. 컴퓨터가 없는 듄의 세계에 반도체도 없을까?

버틀레리안 지하드는 봉건 사회와 비슷해진 듄의 미래 사회를 설명하기 위한 설정이다. 그렇긴 하지만 모든 반도체가 사라졌다고 믿기는 어렵다. 우리는 기계나 도구를 인간 능력의 확장이라는 면에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듄 세계의 인간은 버틀레리안 지하드를 거치면서 지능의 확장에 해당하는 기계의 사용을 멈췄을 뿐이다. 그게 아니라면 행성을 항해하는 우주 비행선도, 순식간에 몸을 보호하는 보호막도, 아니 그 전에 주인공을 해치려고 숨어들어온 기계 모기나 목에 삽입한 통신기도 설명할 수 없다. 모두 멸망한 것이 아니라면, 기술은 쉽게 후퇴하지 않는다.

다만 생각하는 능력은 정말로 증오하니 컴퓨터를 다시 살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생각은 사람이 하면 된다. 듄의 세계에서는 정말로 컴퓨터처럼 계산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아 따로 육성한다. 그들을 ‘멘타트’라고 부른다. 아랫입술에 검은색 한 줄 문신이 있거나 생각할 때 흰자위만 보이는 사람이 바로 이들이다. 컴퓨터(Computer)가 원래 ‘기계’가 아니라 계산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던 걸 생각하면, 뭔가 그럴듯하다.

그런데 이게 가능한 일일까? 인간이 단순 연산 능력에서 컴퓨터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긴 어렵다. 하지만 생각하는 알고리즘을 바꿀 수 있다면, 또한 뭔가 경이롭게 뛰어난 것이 새로 제시된다면, (다른 의미로) 여러 영역에서 컴퓨터만큼 빠른 결론을 내놓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가정’이다. 0과 1로 구성되는 디지털 세계를 뒷받침하는 존재이기에 잊기 쉽지만, 결국 반도체도 물리 법칙을 따른다. 전자가 흐르냐 마느냐에 따라 0과 1이 바뀌고, 그게 얼마나 빨리 흐를지는 반도체를 어떻게 만들고 회로를 어떻게 파는지에 달려있다. 우리 뇌에 담긴 1,000억 개 뉴런과 100조 개 시냅스를 쓴다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어떤 생명체도 그걸 마음대로 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듄에 등장하는 베네 게세리트 같은 단체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집단이다. 뇌 활동을 포함해 신체의 모든 부위를 자기 의지로 조정할 수 있다고 설정돼 있다. 이런 설정을 가진 세계라면, 컴퓨터만큼 빠르게 생각하는 인간을 육성해도 아주 이상하지는 않다.

보호막, 듄의 세계에서 총보다 칼이 강한 이유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기술은 반도체도 아니고 멘타트도 아닌 ‘보호막’이다. 초반 주인공이 군사 책임자인 거니 할렉(조시 브롤린 분)과 대련을 시작할 때, 가장 먼저 보호막을 켠다. 그 보호막은 보이지 않게 사람 전신을 감싸고 있어 특정 속도보다 빠르게 물체가 다가오면 막거나 튕겨낸다. 무협지에서 말하는 ‘기’나 판타지 소설에서 말하는 ‘오러’를 몸에 뒤집어쓰고 있는 셈이다. 이 때문에 다른 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듄만의 독특한 액션 장면이 만들어졌다. 빠르고 경쾌하게 상대방을 제압한 다음, 느리고 천천히 무기를 찔러 넣는다. 총보다 칼이 주로 쓰이는 이유다.

이런 일이 가능할까? 영화 설정에서는 ‘홀쯔만 효과’ 때문에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존재하는 효과는 아니고, 영화에 등장하는 초과학 기술을 설명하기 위한 만능 핑계에 가깝다. 이 홀쯔만 효과와 아라키스 행성에 존재하는 스파이시 멜린지가 없다면 영화 속 기술 대부분은 없던 게 된다.

홀쯔만 효과가 작동하는 원리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을 접을 수 있게 해준다거나, 중력을 무시한다거나,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는 모두 막아버린다거나, 공중 부유하는 램프를 만들 수 있게 해준다고만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가진 기술력으론 꿈도 꿀 수 없다.

사람이 아니라면 어떨까? 미국 보잉사에서 특허 출원한 ‘전자기 아크를 통한 충격파 감쇠(Shockwave attenuation via electromagnetic arc)’ 기술은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차량에 포탄 등이 폭발해 충격파를 만드는 순간, 그걸 감지해 공기를 플라스마 상태로 만들어 충격을 완화하는 기술이다. 보잉이 처음 시작한 기술은 아니고, 플라스마 윈도우라는 이름으로 1990년대부터 연구를 하고 있었다. 자기장을 이용해 특정 공간을 플라스마로 채우는 기술로 어느 정도 점성을 띈 플라스마가 만들어지면 물질이 통과하기 어려워진다고 한다.

정말 실현 가능한 기술일까 싶긴 하지만, 현실에 존재하는 현상이기도 하다. 지구 위 1만 1,600km 상공에 있으면서 지구 외곽에서 날아오는 고에너지 전자를 막아내는 플라스마권(plasmasphere)이 그런 존재다. 헬리오포즈(heliopause)라고 불리는 태양계를 지키는 거대 플라스마 장벽도 있다. 홀쯔만 효과는 가상의 물리 법칙이고 개인의 보호막은 영화 속 설정이지만, 우린 이미 오래전부터 플라스마가 지켜주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

미국 매체 기즈모도(Gizmodo)에서 이런 형태의 에너지 방어막, 포스 실드가 정말 가능하냐고 과학자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대답은 “전자기장을 응용하면 언젠가는 되지 않을까?” 정도로, “특정 에너지를 사용한 보호막보다는 그냥 그래핀(Graphene)으로 만든 옷을 입는 게 나을 것 같다”는 답변도 있었다.

스틸슈트를 입고 오니솝터를 타는 세계, 실현 가능성은?

듄에 등장한 다른 기술은 무엇이 있을까? 보호막만큼이나 인상적인 기술로는 ‘오니솝터(Ornithopter)’를 들 수 있다. 새처럼 날개를 펄럭이며 움직이는 비행기를 뜻하는 일반 용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구상한 비행기를 비롯해 초기 비행기의 디자인은 대부분 이렇게 새 움직임을 본뜬 오니솝터였다. 듄 세계관에선 이 오니솝터가 일상적으로 사용된다. 아니, 사실 주력 교통수단에 가깝다. 영화에선 마치 잠자리처럼 날개를 파르르 떨며 나는 걸로 바뀌었지만, 그래도 오니솝터는 오니솝터다.

영화 속 화려한 모습과는 다르게, 우리 시대 오니솝터는 주로 취미 활동이나 장난감으로 쓰인다. 현대 항공 산업에서 사용되지는 않지만, 최근에는 드론 비행에 도움 되지 않을까 싶어 다시 연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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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듄(Dune)> 스틸컷(사진 제공: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스틸슈트(Stillsuit)의 아름다움에 반한 사람도 있을 듯하다. 아라키스 행성 사막에서 사는 프레멘 족이 입는 검은 옷이다. 호흡으로 작동되는 펌프 등으로 몸에서 나오는 모든 물을 여과해 식수를 만든다. 호흡부터 대소변을 가리지 않고, 신체 바깥으로 배출되는 모든 수분을 다시 회수한다. 사막에서 쓰는 만큼 체온 조절 기능도 달려있다. 물이 피와 같은 가치를 가지는 프레멘 족에게, 스틸슈트는 생명줄이나 다름없다.

언젠가 이런 슈트를 정말 만들 수 있을까? 그럴 필요가 없기를 바라지만, 만들지 못할 것도 없다. 용도가 다르긴 하지만, 우리는 이미 우주복을 만들어 입고 있다. 아라키스보다 더 극한 상황인 우주에서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옷이다. 소변 등을 수거할 수 있는 장치도 달려있다. 다만 이 옷의 무게는 100kg가량 된다. 중력이 작용하는 대기권에서 입을 수 있는 옷은 아니다.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에너지 하베스팅(energy harvesting) 이라 불리는 기술도 필수로 탑재됐을 것이다. 이는 태양 에너지나 사람이 움직일 때 생기는 에너지 등을 모으는 장치로, 스틸슈트 안의 물순환 장치를 가동할 때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해준다.

앞서 얘기했지만, 영화 듄이 가진 가장 좋은 점 가운데 하나는 이렇게 기술이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을 때 어떻게 될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컴퓨터가 사라진 세계에서 인간은 어떻게 기술을 이용할까?’ 하고 상상했던 것에 대해, 듄은 매우 그럴듯한 그림을 보여준다. 그 세계는 결코 상상에만 기댄 세상은 아니다. ‘그래도 언젠가는 되지 않을까?’ ‘비슷한 기술을 적용한 물건이 나오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반도체는 그 세계에서도 매우 발전된 형태로 지금처럼 핵심 기술을 구현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을 것이다.

※ 본 칼럼은 반도체/ICT에 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외부 전문가 칼럼으로, SK하이닉스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 /movie-dune/feed/ 0 영화 [아메리칸 셰프], SNS에서 당신의 무례함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movie-american-chef/ /movie-american-chef/#respond Tue, 24 Aug 2021 20:00:00 +0000 http://localhost:8080/movie-american-chef/ 지난 1981년 TV 토론회에 나온 스티브 잡스는 “컴퓨터의 미래가 인류의 미래”라고 선언했다. 그는 컴퓨터를 “인간의 특정 지적 능력을 증폭시키는 도구이자, 지루한 일에서 벗어나 인간이 좀 더 잘할 수 있고 창의적인 일을 하도록 도와줄 도구”라고 정의하고, “지금 컴퓨터를 배우며 성장하는 아이들은 실제로 창의적으로 이용하고 있고, 그걸 보면 컴퓨터가 해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으로 모든 사람이 컴퓨터를 다룰 수 있다면 정부나 기업의 오용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도 내놨다.

그 후 40년이 지났다. 컴퓨터는 인간의 창의력을 성장시켰을까? 우리는 지루한 일에서 벗어나 새롭고 흥미로운 일을 골라 하고 있을까? 우리가 쓰는 스마트폰은 당시 보급되던 개인용 컴퓨터 애플2+(CPU 속도 1MHz)보다 1,000배에서 2,000배 빠른 프로세서를 쓰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특정 지적 능력은 더 나아졌을까? 아니 그 전에, 그때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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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메리칸 셰프> 포스터(사진 제공: 누리픽쳐스)

영화 ‘아메리칸 셰프(원제: CHEF)’도 맛있는 음식과 함께 우리에게 이런 질문들을 던진다. 당신은 스마트 기기를 가지고 무엇을 하고 있냐고. 혹시 사람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생각하는, 무례한 짓을 하고 있진 않으냐고. 당신이 인터넷으로 하는 험담 때문에, 상처받는 사람들이 있는 건 아느냐고.

SNS에서 시작된 비극, 평범한 셰프의 인생이 바뀌다

아메리칸 셰프는 2014년 개봉한 음식, 여행, 가족, 코미디 영화다. ‘엘프’, ‘아이언맨’, ‘아이언맨 2’, ‘정글북’, ‘라이온 킹’ 등을 감독한 존 패브로(Jon Favreau)가 감독이자 주연(칼 캐스퍼 역)을 맡았다.

덕분에 제작비 1,100만 달러의 저예산 영화인데도 조연이 아주 호화롭다. 더스틴 호프만(리바 역), 스칼렛 요한슨(몰리 역)에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마빈 역, 우정 출연), 소피아 베르가라(이네즈 역)까지, 여기저기 익숙한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이런 호화 멤버가 일하는 레스토랑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다. 오랫동안 지역에서 인정받은 식당이다. 주인공 칼은 이 레스토랑 셰프다. 실력이 좋고 같이 일하는 직원들에게 평판도 좋다. 이혼했지만 나름 아들과도 함께하려고 한다.

나름 나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데, 어느 날 찾아온 유명 요리 평론가이자 블로거 램지 미첼(올리버 플랫 분) 때문에 열 받는 사건이 발생한다. 애써 만든 음식에 별 두 개의 리뷰를 주면서 비난한 것. 그가 쓴 글은 그의 트위터에도 올라갔고, 그 글은 램지 미첼의 수많은 팔로워에게 공유되면서 칼에게 망신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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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메리칸 셰프> 스틸 컷(사진 제공: 누리픽쳐스)

여기에서 끝났으면 그나마 나았을 것이다. 트위터를 모르던 칼은 이 사건으로 트위터 계정을 만들고, 램지 미첼에게 통한의 막말을 날린다. 트위터를 처음 사용한 그는 그 메시지가 모든 사람에게 공개된다는 것을 모르고.

그렇게 서로 막말을 주고받다가 칼이 재대결을 신청하지만, 레스토랑 오너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오히려 직장에서 해고당하게 된다. 안 그래도 화가 났는데, 재대결 날 레스토랑을 다시 방문한 미첼이 비웃는 트윗을 올리자 아예 폭발한다. 레스토랑에 쳐들어가 그와 큰 소리로 말다툼하게 되고, 그 말다툼 영상이 SNS에 다시 올라가며 인터넷 스타로 거듭난다.

누군가가 몰래 찍어 재미있다고 올린 영상 때문에, 칼의 인생과 커리어는 한 방에 날아갔다. 이 사건을 보고 칼이 도움을 청한 SNS 홍보 담당자가 “이제 남은 길은 ‘헬스 키친’처럼 화난 셰프가 등장하는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거나 가만히 숨어서 사건이 잠잠해지길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할 정도다. 자리를 알아본 다른 레스토랑에선 연락이 하나도 오지 않는다. 인터넷에는 칼의 영상이 돌아다니고 신문 기사가 돼 팔린다. 적당히 좋고 적당히 나빴던 인생이 갑자기 롤러코스터를 타게 됐다.

인터넷이 바꿔 놓은 세상… 무례함이 당연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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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메리칸 셰프> 예고편 캡처(사진 제공: 누리픽쳐스)

“당신은 내 자존심을 빼앗았고, 내 경력과 존엄성을 빼앗아 갔어요. 당신 같은 사람들은 신경도 안 쓰겠지만, 그래도 당신은 알아야 해요. 그러는 건 우리한테는 상처예요. 우린 노력한다고요.”

– 영화 ‘아메리칸 셰프’에서 주인공 칼 캐스퍼가 평론가 램지 미첼과 다시 만났을 때 한 말 中

인터넷은 어떤 곳일까? 보통 쌍방향성, 개방성, 익명성을 가진 곳이라고 정의된다. 이런 특징은 전에는 묻혀 있었을, 많은 작은 목소리에 힘을 실어줬다. 헌법재판소에서도 “인터넷은 가장 참여적인 시장이고, 표현 촉진적인 매체”라고 말했다.1)

1) 헌법재판소 2002. 6. 27. 99헌마480 전기통신사업법 제53조 등 위헌소원

인터넷은 우리의 삶을 편하게도 만들어준다. 우린 스마트폰으로 인터넷과 연결해 물건을 사거나 금융 거래를 하고, 친구와 소통하며, 영화, 게임, 음악 등을 즐기는 세상에서 살아간다. 코로나19 시대에 인터넷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과연 버틸 수 있었을까?

반면 인터넷 공간에서는 인간의 악한 마음도 그대로 드러난다. 이미 수많은 사람이 상처받았다. 이럴 줄 몰랐던 것도 아니다. 사이버 폭력은 인터넷 통신 초창기부터 문제가 됐다. 1981년의 잡스도 이런 문제를 짐작했을 것이다. 다만 모두가 컴퓨터를 다룰 줄 알게 되면, 그런 문제를 해결할 방안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직접 대면하지 않는 인터넷 공간에서, 인간이 얼마나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을 수 있는지를 간과했다. 시간이 지나니 사이버불링(Cyberbulling, 인터넷 공간에서 특정인을 집단적으로 따돌리거나 집요하게 괴롭히는 행위)이나 악성 댓글 같은 일이 점점 평범해지고 있다. 때론 우쭐해져서 별생각 없이 하면 안 될 얘기를 적기도 한다. 오죽하면 영화 속 요리 평론가가 당당하게 “나야 원래 독설이 직업인데, 그게 뭐라고 싸움을 거느냐”고 말할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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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된 것일까? 심리학자 에린 버클스는 인터넷에서 악의적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크게 △사이코패스 △권모술수 △자기애 △가학증 등 4가지 성향이 있다고 본다. 이들에겐 상대방을 괴롭히는 것은 놀이다. 본인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남에게 고통을 줘서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고, 그런 가학적인 재미를 위해 노는 것일 뿐이다.2)

2) 출처: Trolls just want to have fun, rin E. Buckels 외 2인, 2014

무례함이 우리를 괴롭히는 이유는?

여기서 잠깐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소개하면, 이 영화는 존 패브로 감독이 자기 인생을 돌아보고 싶어서 찍은 영화다. 영화를 찍고 나서 미국 경제지 ‘패스트 컴퍼니(Fast Company)’와 한 인터뷰를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인터뷰에 따르면 큰 시스템의 부품처럼 영화를 찍다가 질린 감독은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손댈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 이 영화를 만들었다. 요리사 이야기를 하게 된 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그건 너무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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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메리칸 셰프> 스틸 컷(사진 제공: 누리픽쳐스)

각본가로서 영화 스토리 안에는 한 남자가 아빠가 되고, 이혼하고, (현실과) 갈등하는 이야기와 영화판에서 살아온 20년을 돌아보는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고 한다. 그런 영화의 갈등이 트위터 어뷰징(Abusing, 의도적으로 클릭 수를 늘리는 행위)으로 시작됐다는 건, 우리 시대의 주요 갈등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고 있다고 얘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이 이야기가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건, 주인공 칼이 그토록 화났음에도 불구하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벼운 막말을 날리긴 했지만, “이 음식이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히 만든 건지 네가 알기나 하냐?” 정도였다. 계속해서 평론가를 비방하거나 괴롭히지도 않았고, 드러내 놓고 그를 미워하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만약 그가 지켜야 할 선을 넘었다면, 그건 재미있는 영상이 아니라 혐오스러운 영상이 됐을 것이다. 혐오스러운 말을 내뱉은 사람이라면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트위터에 푸드트럭을 홍보했다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몰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선을 넘은 무례함은 관계를 파괴한다. 파괴의 대가는 모두 함께 감당해야 한다. 분쟁을 일으키는 특정 회원 때문에 망한 인터넷 커뮤니티를 본 적 있을 것이다. 진실이 아니라 선동, 분란을 조장하는 악플러도 자주 경험했을 것이다. 실제로 미국 여론조사기관인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의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 성인 10명 중 4명 이상이 온라인에서 괴롭힘을 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게다가 온라인상의 무례함은 일터에서도 영향을 끼친다. 일례로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게임을 만드는 A사는 해당 게임에서 직원들이 채팅한 기록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그 결과 게임에서 드러내는 유해성과 직장에서 보이는 나쁜 언행 사이에 높은 상관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전년에 해고된 직원의 25%가 비정상적으로 게임 내 독성이 높은 사람이었던 것. 그들이 주로 했던 행동은 비꼬는 말이나 폭언이었고, 때론 타인을 위협하기 위해 직원의 권한을 남용하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가장 무례하다 판단된 직원 30명에게 그 사실을 알려줬더니 퇴사를 선택했던 몇 명을 제외하곤 “행동을 고치겠다, 사려 깊은 게이머는 물론 더 나은 사람(Better People)이 되겠다”고 약속했다는 점이다.3)

3) 출처: Riot Games: Assessing toxicity in the workplace https://rework.withgoogle.com/case-studies/riot-games-assessing-toxi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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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처럼 무례한 사람이 많지는 않다. 수는 적은데, 왕성한 활동력으로 세상을 어둡게 만들 뿐이다. 미국 코넬 대학 연구팀이 미국의 대표적인 인터넷 커뮤니티 ‘레딧(Reddit)’에서 40개월간 쌓인 데이터를 가지고 커뮤니티 간 분쟁 발생 구조를 조사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1%의 사용자가 전체 분쟁의 74%를 일으키는 것으로 나타났다.4)

4) 출처: Community Interaction and Conflict on the Web, Srijan Kumar 외 3인, 2018)

또한 지난해 중앙일보에서 분석한 기사를 보면, 네이버 뉴스에서 왕성하게 댓글을 다는 소위 ‘헤비 댓글러’는 전체 작성자의 0.1%인 123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들은 36만 개 댓글 중 무려 16.6%를 작성했다. 댓글을 다는 사람이 전체의 10%도 안 된다는 걸 생각하면 포털사이트에서 연예, 스포츠 뉴스 댓글을 폐지한 데는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5)

5) 출처: [팩플] 네이버 ‘헤비 댓글러’ 123명…이 0.1%가 여론 흔든다 https://news.joins.com/article/23745361

결국, 상냥함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앞서 스티브 잡스는 이런 문제를 생각했을 것이라고 언급했지만, 솔직히 많은 이는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1990년대 인터넷 도입 초기만 해도 우리가 생각했던 문제는 인터넷 공간을 정부가 검열하거나 특정 회사가 독점할 수 있다는 정도였다. 다른 것이 있다면 사람들이 인터넷에 빠져 방 바깥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거나, 개성이 사라지고 집단주의에 빠져들 것이라는 걱정 수준이었다. 현실과 사이버 공간을 분리해 놓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도체 기술이 지금보다 부족했던 세상에선 기술 발전에 신경을 쓰기에도 모자라서, 발전된 기술이 앞으로 어떤 영향을 끼칠지 생각하는 것은 뒤로 미루기 바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인터넷을 쓰지 말자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세상은 변했고, 변한 세상에 어떻게든 적응해서 살아가야 한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사건의 시작은 SNS였지만, 해결책도 SNS에 있었다. 칼이 중고로 사들인 푸드트럭을 고쳤을 때, 그는 옛날식 홍보만 생각했다. 트럭을 세우고 확성기를 통해 주변 사람을 모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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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메리칸 셰프> 스틸 컷(사진 제공: 누리픽쳐스)

하지만, 아빠와 함께한 아들 퍼시(엠제이 안소니 분)는 신세대답게 트위터를 활용해 고객을 모으기 시작한다. 아들은 무례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웃겼던 아빠의 동영상이 그를 유명한 셰프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쉽게도 현실은 영화와는 다르다. 많은 SNS는 어뷰징으로 인해 망가졌고, 이들 서비스 대표는 때때로 국회 같은 곳에 나가 증언해야 할 처지가 됐다. 무례한 글을 덜 쓰게 시스템을 개편해야 하는데 그건 돈벌이에 안 좋으니 내버려 두거나 오히려 그런 글을 더 쓰게 장려한 탓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큰 시스템을 쉽게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영화 속 칼이 보여준 것처럼, 무례하지 않게 살기를 택할 수 있다. 막말을 해야 돈을 버는 세상이어도, 스스로 거기에 묻어갈 필요는 없다.

현실과 가상에서 서로 다른 사람으로 살 수는 없다. 우리 태도는 결국 언젠가는 드러난다. 온라인이건 오프라인이건 막말을 하지 않아야, 자신의 이익을 채우려 남을 비방하지 말아야,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지켜야, 먼저 정중해야, 무례한 사람에게 대처할 힘이 생긴다. 무례하게 굴었던 사람을 도와줄 사람은 없다. 아마 당신이 존경하는 사람 중에 무례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 본 칼럼은 반도체/ICT에 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외부 전문가 칼럼으로, SK하이닉스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 /movie-american-chef/feed/ 0 로봇 청소기가 우리를 위협한다면? ‘러브, 데스 + 로봇 시즌2: 자동 고객 서비스’ /automated-customer-service/ /automated-customer-service/#respond Mon, 14 Jun 2021 20:00:00 +0000 http://localhost:8080/automated-customer-service/ 1-1.jpg

▲넷플릭스 ‘러브, 데스 + 로봇 시즌2’ 공식 포스터(사진 제공: 넷플릭스)

※ 스포일러 있습니다.

오래전, 기기 오작동으로 당황한 적이 있다. 스마트폰 내비게이션 앱을 테스트하면서 운전하고 있는데 갑자기 스마트폰이 꺼진 것이다. 뜨거워진 스마트폰 프로세서와 직사광선이 만나 벌어진 일이었다. 내비게이션 기기를 쓸 때는 경험하지 않았던 일이라 많이 놀랐다. 게다가 초행길이라 눈앞이 캄캄해졌다. 다행히 전에 쓰던 내비게이션이 차 안에 있어 잠시 갓길에 차를 세우고 교체해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보통은 전자 기기가 인간보다 정확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오작동은 생각보다 자주 발생한다. 인간의 실수, 소프트웨어 오류, 과다 사용, 불완전한 설계 등 원인도 다양하다. 지난 5월 이런 기계의 오작동을 다룬 애니메이션이 넷플릭스에 공개됐다. ‘러브, 데스 + 로봇 시즌2’ 에피소드 중 ‘자동 고객 서비스’가 바로 그것. 뛰어난 인공지능(AI)을 가진 로봇 청소기가 갑자기 인간의 적이 된 이야기다.

로봇이 갑자기 인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러브, 데스 + 로봇’의 발칙한 상상력

현실에서도 로봇 청소기가 인간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을까? 지금 기술로는 어렵다. 기술이 더 발전한다고 해도 인간이 스스로를 위협하는 기능을 로봇에 탑재할 가능성은 낮다. 하지만 특정 상황에서는 가능할 수 있다. 고령자들이 모여 사는 고령 친화 도시(Age-Friendly City)나 리조트가 생긴다면, 로봇이 인간을 위협할 수도 있지 않을까? ‘러브, 데스 + 로봇’ 시즌2의 ‘자동 고객 서비스’는 이런 상상력에서 출발한 에피소드다.

에피소드 주인공 자넷이 사는 ‘해질녘 도시(Sunset City)’의 거주자는 모두 노인이며, 은퇴해서 할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한가로이 여유를 즐기는 고령자들을 돌보는 일은 모두 로봇이 한다. 서비스를 받는 사람은 있어도,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은 없다.

사람이 하던 일은 모두 로봇이 한다. 그러다 보니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로봇 종류는 정말 다양하다. 하늘을 나는 드론, 풀장에서 음료를 서빙하거나 안마하는 로봇, VR 기기로 조작하면 대신 움직이는 게임 로봇, 미용실에서 머리와 발톱을 다듬고 피부 주름을 펴주는 로봇, 자율주행하는 가방이나 휠체어, 의족 로봇, 개를 산책시키는 로봇까지, 요즘 개발 중인 서비스 로봇 대부분이 등장한다. 마치 영화 ‘월-E’에 나오는 우주선 생활처럼 인간이 편리하고 행복할 것만 같은 풍경이다.

문제의 가정용 청소 로봇이 등장할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자넷은 한가하게 요가를 하고 그녀의 반려견도 편안히 쉬고 있다. 청소 로봇도 자넷을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일하고 있다. 옆집 할아버지가 집안을 슬쩍 들여다보는 눈치지만, 자넷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청소 로봇과 이상한 주도권 다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모든 게 평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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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 고객 서비스’ 中 자넷이 청소 로봇의 공격에 대항하는 모습(사진 제공: 넷플릭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자넷은 청소 로봇의 단순 오작동인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청소 로봇이 애완견을 공격하고, 이에 항의하는 자넷까지 공격하기 시작한다. 급하게 연락한 자동 고객 서비스도 엉망이다. ‘살고 싶으면 애완동물을 로봇에게 던져 희생시키라고? 응? 아니, 여보세요, 뭐라고요?’ 자넷의 황당함이 화면 밖에서도 느껴진다.

‘로봇의 공격’은 인간의 공포심이 만들어낸 허상… 로봇은 자기 할일 하기도 바쁘다

로봇이 인간을 공격할 수 있다는 공포심은 정말 오래전부터 있었다. ‘로봇’이라는 말은 체코를 대표하는 세계적 작가 카렐 차페크(Karel Capek)가 처음 썼는데, 그의 희곡 ‘R.U.R(Rossum’s Uni­versal Robots)’의 내용도 인간을 공격하는 로봇 이야기다. 인간은 로봇의 탄생부터 로봇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고 할 만하다. 오죽하면 SF의 거장인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가 ‘로봇 공학 3원칙(Three Laws of Robotics)’을 만들어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가하면 안 된다’는 원칙을 핵심 원칙으로 삼았을까.

물론 실제로 서비스 로봇이나 군사 로봇이 오작동한 사례도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서비스 로봇이 인간을 공격하기에는 너무 무력하다. 여기에는 기술적인 이유가 크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우선 필요 이상의 성능을 가진 기능을 집어넣을 경우 가격이 비싸진다. 같은 값이면 가장 저렴한 부품을 찾는 것이 로봇 제작사, 즉 기업의 특징이다.

소송 문제도 있다. 기기가 이용자의 생명을 위협한다면 제조사가 큰 보상금을 내거나 아예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도 사람을 해칠 기능을 넣는다면 그건 십중팔구 범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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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의민족의 서빙 로봇 ‘딜리’(사진 제공: 배달의민족)

사람을 공격하지는 않지만 에피소드에 등장한 로봇들은 이미 우리 주변에 있다. 예컨대 배달의민족은 식당용 서빙 로봇 ‘딜리’를 대여한다. 별도로 실내외 배달 로봇도 테스트 중이다. 그뿐만 아니라 앞으로 다른 회사와 협의해 실제 쓸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로봇 개발도 계획하고 있다.

해외에서도 배달 로봇을 앞다퉈 선보이는 추세다. 스카이프(Skype)의 공동 창업자 아티 헤인라(Ahti Heinla)와 제이너스 프리스(Janus Friis)가 설립한 스타십(Starship Technologies)은 최근 자율주행 배달 로봇으로 100만 배달 건수를 달성했다. 미국의 아마존(Amazon)과 리프랙션 AI(Refraction AI)는 각각 ‘스카우트(Scout)’와 ‘REV-1’로 명명한 자율주행 배달 로봇을 공개했고, 일본 앤드로보틱스(AndRobotics)의 ‘후루테라(Frutera)’와 중국 알리바바(Alibaba)의 ‘샤오만뤼(小蛮驴)’도 자율주행 배달 로봇으로 소개됐다.

자율주행 자동차는 아직 먼 미래처럼 여겨지지만, 자율주행 카트나 셔틀버스는 실증(實證) 실험이 진행 중이다. 정해진 장소나 코스에서만 운행해 안정성이 높기 때문. ‘러브, 데스 + 로봇’에서처럼 이미 이를 활용하고 있는 고령자 대상 요양 시설도 있다. 특히 자율주행 셔틀버스는 노령층의 운전 사고 위험을 줄이면서도 도시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고, 다른 대중교통보다 저렴해 대안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밖에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로봇과 유사한 로봇들도 이미 현실에 여럿 존재한다. 자율주행 이동장치와 닮은 기기도 현실에 있다. 세그웨이(Segway)가 내놓은 콘셉트 모델 ‘S-POD’는 두 바퀴가 달린 1인승 이동 장치다. 머지않은 미래에 상용화된다면 나중에 다리가 아파 걷기 힘들 때 잘 써먹을 수 있을 듯하다. 아직 가격이 비싸 상용화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로봇형 의수도 이미 개발이 완료됐다. 자동으로 머리나 손발톱을 손질해 주는 기기는 아직 없지만, 안마는 이미 안마 의자가 대신하고 있다. 다만, 반려견 산책을 대신해주며 개똥을 치워주는 로봇을 가까운 미래에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문제는 로봇의 공격성이 아닌 인간의 이기심

하지만 ‘러브, 데스 + 로봇’ 시즌2의 ‘자동 고객 서비스’ 에피소드가 완전히 근거 없는 상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누군가 이익을 위해 로봇을 이용해 인간을 해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다시 애니메이션으로 돌아가 보자. 청소 로봇은 인간을 왜 공격하게 된 걸까? 청소 로봇엔 작은 유해 동물들을 제거하는 기능이 있는데, 처음에는 이 기능이 오작동해 동물과 사람을 공격하는 것처럼 묘사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로봇 제조회사가 추가 수익을 얻기 위해 청소 로봇에 악성 프로그램을 숨겨 둔 것.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자동 고객 서비스는 “앞으로 모든 로봇이 당신을 쫓을 건데, 그게 싫으면 로봇을 종료할 수 있는 화이트 리스트(White List) 서비스에 유료로 등록하라”며 오히려 고객을 위협한다. 로봇이 인간을 공격할 이유는 없지만, 인간이 로봇에게 다른 인간을 공격하도록 지시할 이유는 있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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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비슷한 사건이 얼마 전에 일어났다. 미국 동부 지역에 석유류를 공급하는 송유관 운영 회사 ‘콜로니얼 파이프라인(Colonial Pipeline)’이 해커 집단인 ‘다크 사이드(Dark Side)’로부터 랜섬웨어 공격을 받아, 미국 남부와 동부를 연결하는 약 8,850㎞ 길이의 송유관이 일시 폐쇄된 것. 국가 기간 시설이 해커에게 당하는 사건이 영화가 아니라 현실에서 일어났다. 해커는 “복구를 원하면 돈을 내놓으라”고 요구했고, 결국 회사는 500만 달러를 그들에게 건넸다.

누군가는 “국가 기간 시설을 해킹하는 것과 홈 서비스 로봇에 탑재된 기능을 바꾸는 것은 문제의 성격이 다르지 않냐”고 반론할 수 있다. 하지만 요즘 이뤄지는 많은 해킹이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다. 다크 사이드가 스스로 밝혔듯 ‘사업’에 불과하다. 해킹 프로그램은 다크 웹(Dark Web, 특수한 웹브라우저를 사용해야만 접근할 수 있는 웹)에서 쉽게 살 수 있고 주문 제작도 가능하다. 어떤 기술적인 결함을 끈질기게 파헤쳐 침투한 게 아니라는 의미다. 악성코드는 대부분 우리의 사소한 욕망, 즉 한 푼이라도 더 벌고 싶거나 공짜로 프로그램을 쓰고 싶은, 또는 부끄러운 부분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을 이용해 침투한다.

좀 더 따져 보자. 자넷이 사는 요양 도시 속 여러 로봇은 아마 사용료가 지불됐기 때문에 움직이고 있을 거다. 간편하게 쓸 수 있는 로봇이니 특별한 기능을 익힐 필요도 없어 보인다. 물론 로봇이 애완동물을 해칠 수 있다는 걸 알았다면 함부로 들이지는 않았을 거다. 하지만 나쁜 회사는 서비스를 소비자에게 세세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자동 고객 서비스가 대처하는 방식을 보면, 고객 클레임이 들어와도 자동으로 무시했을 거다. 회사 입장에서 고객은 요양 도시에 들어온 ‘잡은 물고기’였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고객을 더 쥐어짜 추가 이익을 거두는 것이었다.

참고로, 청소 로봇이 처음부터 자넷을 공격한 것은 아니다. 자동 고객 서비스의 조언에 따라 껐다 켜려고 버튼을 눌렀더니 제거 모드가 작동했다. 다시 말해 로봇 회사는 청소 로봇이 자넷을 죽이려고 공격하게 된 것이 전적으로 자넷의 실수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기술을 신뢰하려면 기술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우린 누군가가 설계한 대로 쉽게 정보를 넘겨주는 데 익숙하다. 복잡해 보이는 건 믿고 맡기고 쓴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에서 당신의 활동을 추적하고 그 정보를 다른 회사에 넘길 수 있는 ‘광고 ID’라는 게 있다. 법적으로 이용자가 동의하지 않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앱은 이를 필수 약관에 집어넣고 동의를 받는다. 나중에 스마트폰 설정에서 동의를 철회할 수 있지만 이런 건 꼭꼭 숨겨져 있어 잘 보이지도 않는다. 일례로 얼마 전 구글이 사용자들의 위치 정보를 추적할 수 없게 될까봐 해당 설정을 숨기고 의도적으로 안 보여주려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럼 로봇을 의심하지 않은 자넷이 잘못한 걸까? 아니다. 사기꾼이 나쁜 거다. 다만 세상엔 상대방이 모르게 손해를 입히는 사람이 넘쳐난다. 그러니 알아야 하고, 제대로 쓰이도록 만들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코로나19 영향으로 정보통신 기술 기반의 사회로 더욱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장단점이 있지만, 단점이 커지는 속도는 늘 생각보다 훨씬 빠르다. 우리는 이런 때 뭘 하면 좋을까? 결말에서 자넷은 추가 서비스 유료 가입을 거부하고 영원히 도주하기를 선택했다. 영원히 도주하기 싫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새롭게 등장하는 기술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기술이 악용되지 않게 감시해야 하는 이유다. 그래야만 누군가 반도체 기술이 가져다준 희망을 절망으로 바꾸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 본 칼럼은 반도체/ICT에 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외부 전문가 칼럼으로, SK하이닉스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 /automated-customer-service/feed/ 0 ‘원더우먼 1984’로 읽는 80년대 IT /wonder-woman-1984/ /wonder-woman-1984/#respond Thu, 04 Feb 2021 20:00:00 +0000 http://localhost:8080/wonder-woman-1984/ ※ 스포일러 있습니다

‘잼을 넓게 바르면 바를수록 더 얇게 발라진다(The wider you spread jam, the thinner jam gets)’

‘컨설팅의 비밀’의 저자 제럴드 와인버그가 만들어낸 ‘딸기잼의 법칙’이다. 상충하는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질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여러 업무를 경험해본 ’이나 ‘단순하면서도 화려한 디자인’ 같은 건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사람은 종종 이런 모순된 욕망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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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승 안티오페와 어린 다이애나의 모습(사진제공 :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영화 ‘원더우먼 1984’ 오프닝에서, 어린 다이애나(릴리 아스펠 분)가 편법을 써서라도 이기고 싶었던 마음도 이와 비슷하다. 실수하긴 했지만, 아마존 최고의 전사로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은 그를 편법으로 이끈다. 하지만, 엄격한 스승이었던 안티오페(로빈 라이트 분)는 그런 잘못된 욕망을 곧바로 간파하고, 억울해하는 어린 다이애나에게 일갈을 날린다.

“No true hero is born from lies”

속임수를 쓰는 사람이 진정한 영웅이 될 수 있을 리 없다. 영화 원더우먼 1984는, 그렇게 핵심 주제를 처음부터 강조하며 시작한다.

‘워크맨’이 유행하던 1984년, 그 시절의 추억 속으로

그리고 시간이 흘러, 1984년이 됐다. 그사이 원더우먼은 인간 세상에 나와 제1차 세계 대전을 겪었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아픔도 겪었다. 평소에는 박물관 직원으로 일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시민의 영웅으로 활약하며, 위기에 빠진 시민을 돕고 나쁜 일을 하려는 악당을 퇴치한다. 슈퍼 히어로가 하는 일은 항상 비슷하다. 친절한 자경단 또는 민간 경비다.

하는 일은 2021년의 슈퍼 히어로와 다르지 않은데, 배경은 다르다. 1984년에는 누구도 스마트폰을 들고 있지 않다. 걸으면서 전화하는 사람도 없다. 새로운 소식을 접하기 위해서는 TV나 신문을 봐야만 한다. 당연히, 마스크를 쓴 사람도 없다.

영화 초반 원더우먼이 위기에서 구해낸, 조깅 중이던 여성은 귀에 유선 헤드폰을 끼고 있다. 사용 중인 기기는 당시 큰 인기를 끈 최초의 휴대용 오디오 플레이어 ‘워크맨’이다. 1979년에 처음 출시된 이 제품은 우리 삶에 3가지 영향을 끼쳤다. 하나, 걸으면서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됐다. 둘, 혼자서 조용히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됐다. 셋, 녹음 매체로 주로 쓰이던 카세트테이프를 음악 감상 매체로 쓰게 됐다. 요약하면, 워크맨은 개인주의를 처음 실현한 전자기기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디지털 레코딩(Digital Recording) 기술과 반도체 기술 발달이 가져온 변화다.

이처럼 기술이 발달하면 발상의 전환도 가능해진다. 이제는 노래를 디지털 파일로 변환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서버에 저장된 디지털 파일을 실시간으로 개인 기기로 옮겨와 스트리밍하는 것이 당연해졌다. 미리 저장해놓은 음악만 들을 수 있는 ‘카세트’도 이미 구시대의 유물이 된 지 오래다.

이제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음악을 찾아 들을 수 있는 시대다

▲SK하이닉스의 소비자용 SSD ‘Gold P31’, ‘Gold S31′

이제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음악을 찾아 들을 수 있는 시대다. 웹에서 원하는 음악을 검색해 바로 들어볼 수 있고, 누군가 노래를 부르는 영상을 바로 재생할 수도 있다. 음악을 담는 저장매체 역시 발전을 거듭했다. 10여 곡만 겨우 저장할 수 있었던 카세트테이프는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CD와 MP3의 시대를 지나, 지금 우리는 테라바이트(TB) 단위까지 저장이 가능한 SSD(Solid State Drive)와 같은 반도체 계열 저장 매체의 시대를 살고 있다.(관련 기사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음악 매체의 시대, 반도체가 음악을 담는다’)

‘테트리스가 처음 등장한 해’ 1984년, 컴퓨터의 모습은 어떨까?

1984년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기기가 ‘워크맨’만 있는 건 아니다. 80년대는 디지털 게임과 개인용 컴퓨터, 카세트테이프와 비디오테이프 같은 자기 매체, 컬러 TV 등이 세상을 사로잡았던 시대다. 일례로 원더우먼이 도둑질하려던 악당을 잡은 쇼핑몰 안에 있는 오락실을 들 수 있다.

1984년은 전자오락이 붐을 이뤘다가 꺼져가던 시기로, 오락실은 지금의 PC방 같은 공간이었다. 오락실은 1985년에 개봉한 영화 ‘구니스’ 오프닝에도 등장한다. 게임 프로그래머가 주인공인 넷플릭스의 ‘블랙 미러:밴더 스내치’의 배경도 1984년이다.

당시엔 게임 소프트웨어 하나가 기판 하나였다. 주로 쓰인 CPU는 속도가 3.54MHz인 Z80. 그때보다 1,000배 이상 빠른 약 3.8GHz에 달하는 지금의 CPU 속도와 비교하면 성능 수준은 보잘것없지만, 그 시절 오락기는 하나하나 그 게임을 위해 만들어진 전용 컴퓨터였던 셈이다.

▲사진제공 :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범용 컴퓨터는 없었을까?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 회사 사무실, 나중에 ‘치타’라는 이름의 적이 되는 박물관 동료 바바라 미네르바(크리스틴 위그 분)의 사무실, 사이먼 스 (올리버 코튼 분)의 사무실 등 영화 속 곳곳에서 익숙한 듯 낯선 형태의 컴퓨터를 찾을 수 있다.

그중에서도 바바라 미네르바의 사무실에 놓인 컴퓨터는 지금은 아는 사람이 드문 ‘코모도어 PET’ 기종이다. 1980년에 출시된 컴퓨터로, CPU는 1MHz 속도를 가진 MOS 6502를 사용한다. 메모리는 32KB다. 화면에 보이는 건 당시 쓰이던 PC 통신 게시판(BBS)으로 짐작된다.

사이먼 스 의 사무실에 놓인 컴퓨터는 같은 PET 시리즈이긴 하지만, 1977년에 출시된 코모도어 PET 2001이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최초의 PC라고 볼 수 있다. 옆에 놓인 휴대용 컴퓨터는 TRS-80 모델 100이란 제품으로, 1983년에 출시된 컴퓨터다. 당시 기준으로는 최신 컴퓨터인 셈. Oki 80C85 CPU를 써서, 처리 속도가 2.46MHz 정도로 당시 일반적인 컴퓨터 대비 훨씬 빨랐다. 계산기처럼 보이지만, 출시 가격은 1,099달러로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2,821달러(약 312만 원)에 달한다.

램이 1GB(=104만 8,576KB)이고, 프로세서 속도가 1.4GHz(=1,434MHz)인 ‘카카오 미니 AI 스피커’가 당근마켓에서 중고로 2만 5,000원 정도에 거래되는 것과 비교하면, 지난 40년간 IT 기기의 가격은 정말 미친 듯이 싸졌다.

소원을 이뤄주는 돌(드림스톤)로 세계를 핵전쟁 위기에 빠트리게 되는 맥스 로드(페드로 파스칼 분)의 사무실에 놓인 PC는 1981년 IBM에서 출시한 개인용 컴퓨터다. 실제로 모델명이 ‘IBM Personal Computer’였던 이 제품은 1983년에만 75만 대 이상이 판매되며, 사무용 컴퓨터 시장을 말 그대로 쓸어 담았다. CPU는 4.77 MHz 속도를 가진 인텔 8080이고, 2개의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버가 장착됐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니터 화면의 색상은 대부분 화이트 계열이고 맥스 로드가 전 세계 방송을 해킹한 이후에는 컬러 화면이 나오기도 하지만, 이는 영화적 허용이다. 당시 주로 쓰이던 모니터는 그린 컬러 단색 모니터였고, 당연히 컬러 화면은 절대 구현할 수 없었다.

지금은 ‘못난이 컴퓨터’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컴퓨터의 위상은 지금보다 예전이 더 높았다.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흔하게 볼 수 없었고, 대중들 사이에서는 ‘마법사’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실제로 저 컴퓨터로도 할 건 다 했다. PC 통신이나 채팅을 할 수 있었고, 게임도 할 수 있었다. 엑셀 같은 계산 프로그램도 많이 사용했다. 데이터베이스 작업이나 프로그래밍도 할 수 있었고, 그림을 그리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추가 부품을 장착하면 음악 작업을 하거나 컬러 그래픽도 볼 수 있었다. 컴퓨터의 쓰임새는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기술은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가?

기술 자체가 세상을 바꾸지는 않는다. 기술이 발전하면 발상의 전환이 가능해지고, 생각이 바뀌면 세상에 영향을 끼칠 무언가가 탄생하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욕망에 충실하되, 속임수를 쓰지 않는 것’이다.

이 영화의 메인 빌런(Villain, 악역)인 맥스 로드는 자신이 가진 능력이 남의 소원을 이뤄주는 대신 그 사람에게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져올 수 있는 능력이란 것을 깨닫게 된다. 이를 알게 되자마자 미 대통령을 만난 그는 원하는 핵무기를 주고, 대신 대통령이 가진 영향력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미국이 비밀리에 추진하던 프로젝트 하나를 알게 된다. 인공위성을 이용해 전 세계 방송을 해킹하는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이 그 프로젝트의 목표. 이후 그는 이 시스템을 이용해 세계를 상대로 자신의 능력을 써먹겠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마침내 원더우먼 1984의 최종 국면, 맥스 로드는 해킹한 TV를 통해 감언이설을 쏟아내며 세상을 속이려 한다. “왕이 되고 싶어? 만들어 줄게. 저 나라가 망했으면 좋겠어? 망하게 해줄게.” 누구도 책임질 수 없고, 노력 없이 쉽게 충족되는 잘못된 욕망이 낳은 결과는? 대혼란이다. 세계는 정말 멸망 직전까지 무너졌다.

이에 맞서 원더우먼은 “당신은 오직 진실만 가질 수 있으며, 그것 하나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이때 ‘진실’이란 우리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이다. 원하고 꿈꾸는 것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책임한 욕망이 아니라, 가능한 기술적 영역 안에서 정말 원하는 것 하나를 찾아 스스로 이뤄가는 힘이다.

원더우먼 1984의 쇼핑몰 오프닝 씬에서는 에어로빅 시연을 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1982년에 발매된 ‘제인 폰다의 워크아웃’이라는 에어로빅 비디오가 크게 인기를 끌면서, 미국 사회에 에어로빅이 일상이 된 시대상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사실 제인 폰다는 자신이 레오타드를 입고 운동하는 모습을 불특정 다수가 매일 아침 보길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더 많은 여성이 운동하길 원하는 ‘욕망’이 있었다. 그래서 ‘누가 이런 걸 보겠어?’라고 생각하는 대신, 자신의 욕망을 담아 비디오를 촬영했다. 또한, 대역을 쓰기보다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자신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 결과, 미국 전역에 에어로빅 열풍을 일으킬 수 있었다.

기술이 세상을 바꾸는 방법도 이와 다르지 않다. 편하게 전화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휴대폰을 만들어냈다. 아무 데서나 인터넷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스마트폰을 만들어 냈다. 단, 휴대폰이나 스마트폰을 만든 그 누구도 이런 기술을 쉽게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술 발전을 위해 매일을 충실하게 보냈다. 이처럼 자신의 진짜 욕망에 충실하되 하나씩 자기 손으로 이뤄가는 것, 이것 하나면 세상을 바꾸기에 충분하다.

※ 본 칼럼은 반도체/ICT에 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외부 전문가 칼럼으로, SK하이닉스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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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보건교사 안은영이 될 수 있을까? /ahn-eun-young-a-public-health-teacher/ /ahn-eun-young-a-public-health-teacher/#respond Sun, 22 Nov 2020 20:00:00 +0000 http://localhost:8080/ahn-eun-young-a-public-health-teacher/ 세상에는 나만 볼 수 있는 것이 있다. 인스타그램에서 저장한 이미지나

(이미지 제공: 넷플릭스)

 

※ 스포일러 있습니다

세상에는 나만 볼 수 있는 것이 있다. 인스타그램에서 저장한 이미지나, 암호를 걸어둔 파일이 그렇다. 누구나 볼 수 있지만, 이용 권한을 조정하면 다른 사람은 볼 수 없는 콘텐츠가 된다. 최근 큰 화제를 모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의 주인공 안은영(정유미 분)에게도 그녀에게만 보이는 것이 있다. 알록달록 반투명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다니는 젤리다.

젤리는 기(氣)나 아우라(Aura) 같기도 하고, 누군가의 감정/욕망이거나 영혼일 때도 있다. 이처럼 안은영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누군가는 있다고 믿는 것들을 본다. 그래서 그녀는 항상 이렇게 외친다. “왜 나만 보이고 XX이야!” 젤리는 사람에게 좋을 때도 있지만 안 좋을 때가 많다. 젤리가 붙은, 아픈 사람으로 가득 찬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했던 그녀는 그 사실을 잘 안다. 나쁜 일이 생기기 전에 안 좋은 젤리를 빨리 잡아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잡는다고 무슨 이익이 생기지도 않는다. 그래서 도망쳤다. 도망쳐 편하게 살려고 목련고등학교 보건교사가 됐다. 그랬는데, 알고 보니 목련 고등학교는 아예 젤리를 불러 모으는 장소였다.

이 드라마의 장르는 무려 판타지 코미디 미스터리 액션. 이 드라마는 현실과는 다소 동떨어진 설정에 주인공을 던져 넣고, 조금 특이한 추격 액션 활극으로 시청자들을 초대한다. 재미있지만, 솔직히 조금 징그러운 장면도 나온다.

우리도 젤리 잡는 보건교사가 될 수 있을까?

안은영은 날 때부터 젤리를 보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덕분에 갖은 고생을 한다. 말해봤자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을, 그런 능력인 탓이다. 보고 싶은 것만 골라볼 수도 없다. 때론 불에 탄 영혼이 자기에게 찾아와 하소연하고,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이 젤리로 흩어져 사라지는 걸 봐야 했다. 남들이 보여주기 싫은, 감춰두고 싶은 감정도 본다. 중학교 때 김강선(최준영 분)이라는 친구를 만나지 않았다면, 평생 젤리를 두려워하고 도망만 다니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안은영에게는 젤리를 보는 것이 그렇게 달갑지 않은 일일 수 있지만, 사실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 특별한 것을 보는 것은 살면서 한 번쯤 해보고 싶은 경험일 수 있다. 하지만 평범한 우리가 얻기는 쉽지 않은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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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etflix가 인스타그램에서 제공하는 젤리 필터(넷플릭스 젤리 필터 캡처 화면)

가짜 젤리라도 보고 싶다면 인스타그램 앱을 열자. @netflixkr 계정 페이지에 가보면 netflix가 제공하는 사진 필터가 있다. 그 필터를 이용하면 예쁜 젤리와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입을 열면, 젤리가 도망가기도 한다. 이런 기능을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AR)이라고 한다. 현실 이미지 위에 컴퓨터 그래픽을 덧붙여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기술이다.

AR은 포켓몬고 게임으로 유명해졌지만, 이미 다양한 형태로 많이 쓰이고 있다. 셀카 앱으로 사진을 찍을 때 눈물이나 토끼 귀를 달아본 적이 있다면? 그게 바로 AR이다. 요즘 카메라 앱은 자동으로 피부 보정을 해준다. 이것 역시 AR 기능이다.

이케아에서 만든 이케아 플레이스 앱은, 가구를 사기 전에 미리 집에 배치해서 볼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한다. 구글 번역기를 이용하면, 해외 원서에 쓰인 외국어를 바로 번역해서 읽을 수 있게 해준다. 해외 여행할 때나 해외 온라인 쇼핑몰에서 직구한 물건의 사용 설명서를 볼 때 쓰면 좋다.

증강현실, 우리도 젤리와 싸울 수 있게 해주는 기술

AR 기술이 지금 수준에 도달하기까지의 여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AR 기술은 안은영이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연구개발이 진행됐지만, 상용화되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1960년대 CG의 아버지 이반 서덜랜드가 만든 머리에 쓰는 디스플레이 장치(HMD)가 가상현실&증강현실로 향하는 문을 연 최초의 시도로 알려져 있다.(관련글 [반도체 인명사전] 컴퓨터 그래픽 기술의 선구자 이반 선덜랜드)

하지만 현실 속 가상 세계를 위화감 없이 구현하기까지는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고, 최초의 AR 장치라고 할 만한 물건은 1990년대에 와서야 처음으로 등장했다. 그 장치는 1992년 미 공군연구소(AFRL)에서 개발한 가상 설비(Virtual Fixtures)로, 이 기기를 사용하면 자신의 팔을 마치 로봇 팔처럼 보며 움직일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NASA에서 1999년 지도 데이터를 파일럿이 보는 화면에 겹쳐서 보여주는 NASA X-38 비행 테스트 시스템을 만들었고, 2000년에는 카토 히로카즈가 증강현실을 구현하는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라이브러리인 ‘ARToolKit’을 개발하게 된다.

이때가 1차 전환기였다. 마침 획기적으로 좋아지던 컴퓨터 성능에 더해 인터넷 보급으로 지식이 확산되며, 많은 사람이 자기 아이디어를 AR로 구현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에는 아주 간단한 영상도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우선 현실 이미지 위에 보여질 3D CG 객체가 있어야 했다.

당시 사용되던 웹캠(Webcam, PC에 장착해 실시간으로 촬영된 화면을 전송하거나 인터넷을 이용해 화상 회의를 하는 데 사용하는 소형 디지털 카메라)으로는 위치나 방향 등을 인식하기 어려워서 마커(Marker)라고 불리는 특수한 문양을 인쇄해 CG가 등장할 위치와 방향을 잡아줘야 했다. 이를 ‘마커형 AR’이라고 한다. 아쉬운 대로 쓰긴 했지만, 구현된 가상 이미지가 어색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중에 반도체 기술, 그 중에서도 카메라와 프로세서 성능이 좋아지면서, 마커 없이 AR 영상을 보여줄 수 있는 기술이 탄생했다. 이를 ‘마커리스(Markerless) AR’이라고 한다. 마커리스형이 널리 쓰이면서 이젠 마커든 마커리스든 둘 다 듣기 힘든 단어가 됐다.

‘마커리스 트래킹’ 기술은 영상 속 물체의 특징을 점으로 추출한 뒤 이 점을 계산해 공간을 인식하는 기술이다. 여기에 더해 GPS, 디지털 나침판, 가속도 센서(이동하는 물체의 가속도를 측정하는 센서), 자이로 센서(회전하는 물체의 역학운동을 이용한 개념으로 위치 측정과 방향 설정 등에 활용되는 기술) 등 스마트폰에 장착된 반도체 칩을 이용하면, 사물의 위치와 움직임, 속도, 방향 등을 정밀하게 추적할 수 있다. 이처럼 AR 영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다양한 반도체 센서 기술이 필요하다. AR 영상을 만드는 데 필요한 모든 센서가 장착된 스마트폰이 등장하자 AR이 다시 각광을 받은 것만 봐도 그렇다.

이런 기술 발전에 힘입어 이제 우리도 AR 게임이나 앱을 통해 현실에서 젤리를 쫓아 추격할 수 있게 됐다.

보건교사 안은영이 될 필요는 없겠지만

이처럼 오랜 시간과 많은 노력을 들여 우리가 이제야 겨우 할 수 있게 된 것을 안은영은 아무 노력도 들이지 않고 간단하게 해낸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이 마냥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늘어가는 젤리에 골치가 아플 무렵, 한 학생이 곤충에 물렸다고 찾아온다. 그 상처가 위험한 것을 눈치챈 그녀는 학생을 병원에 보내려 하지만 학생이 도망치고, 그 학생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다가 학생의 담임인 한문교사 홍인표(남주혁 분)를 만나게 된다.

이 남자는 세상에서 보기 드문 좋은 기운을 가진, 다시 말해 젤리를 막는 자체 보호막을 가진 사람이다. 안은영은 남들은 아무도 못 보는 그 보호막을 쉽게 보고 그에게 다가간다. 자기가 힘을 쓰는 데 필요한 좋은 기운을 충전해 줄 수 있는 드문 사람이기 때문. 그녀만의 전용 외장 배터리를 발견한 셈이다.

새로운 아이템이 생겼지만 좋아할 수만은 없다. 이럴 땐 항상, 새로운 사고가 터진다는 말이니까. 보건교사-한문교사 커플은 같이 학생을 찾다가 학교 지하실에서 나쁜 기운을 막기 위해 설치한 돌을 열어버리게 되고, 여기서 튀어나온 초대형 젤리는 큰 사고를 친다. 이어 학생들의 방석 사냥으로 인한 사건, 재수 옴 붙이는 ‘옴’ 젤리들이 대량 번식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후 안은영은 이 학교에 대량으로 존재하는 젤리의 비밀을 알게 된다.

젤리를 자원으로 여긴 두 단체가 물밑에서 싸우고 있었고, 알고 보니 이 학교는 젤리를 모으기 위해 고안된 학교였다. 이제 안은영은 옛 가족이었던 그들의 욕망을 엎어버릴 계획을 짠다.

안은영이 고민하고 방황하는 사이, 누구나 젤리를 볼 수 있고 젤리와 싸울 수 있게 해주는 AR 기술은 어떤 방향으로 나가고 있을까? 구글은 ‘구글 글래스’라는 AR 글래스를 개발했고, 최근에는 구글 렌즈 앱을 통해 번역, 쇼핑 같은 다양한 AR 기반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애플은 최신 아이폰과 아이패드에 공간 측정 센서인 ‘라이다(Light Detection And Ranging, LiDAR) 스캐너’를 장착해 AR 기능을 강화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홀로렌즈 기기(혼합현실 기반 웨어러블 기기)’를 개발해 공동 작업 환경과 다양한 활용 방향을 테스트하고 있다.

여기서 보듯, 거대 기술 기업들은 이미 이 증강현실 기술 경쟁에 뛰어들었다. 페이팔이나 스냅챗 같은 서비스 회사도 가세하고 있다. AR을 스마트폰 다음 성장 동력으로 여기는 이야기도 나온다. AR 사용환경이 대중화되고, 페이스북이 최근 선보인 인피니트 오피스처럼 확장현실(eXtended Reality, XR)까지 이어질 수 있다면, 컴퓨팅 환경 자체가 격변할 것으로 예측되기 때문. PC와 스마트폰을 쓰지 않고도 웹 서핑, 문서 작업, 게임 등을 할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과연 어떤 서비스가 등장하게 될까?

최근 SK하이닉스에서는 AR 서비스에 쓰이는 중요 반도체인 비행시간차(Time of Flight, ToF) 이미지 센서를 개발하고 있다고 밝혔다. 센서에서 쏜 빛이 물체에 반사되어 돌아오는 시간을 측정해 거리나 사물의 모습, 공간 정보를 파악하는 센서다. 앞서 말한 애플 라이다 센서가 ToF 센서의 다른 이름이다. 컴퓨터가 현실 공간 정보를 읽는다는 면에서 같기 때문에, 자율주행차에도 많이 쓰인다. 그리고 이 센서는 더 정밀하게 공간을 파악해, 마치 그 공간에 있는 것처럼 CG 캐릭터를 만들어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다. 여기에 AI를 비롯한 다양한 기술이 결합되면, 우리는 정말 안은영에 버금가는 능력을 얻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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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제공 : 넷플릭스)

극 중에서 안은영은 젤리를 보는 능력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젤리가 안 보이는 세상은 평온하고 행복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에게 뭔가를 할 수 있는 힘을 앗아갔다. AR 기술이 대중화된다면, 우리 역시 인터넷과 스마트폰에 버금가는 새로운 힘을 손에 넣게 된다. 그건 축복이자 재앙이 될 가능성이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그 힘을 어떻게 써야 할까?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이 지금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새로운 화두다.

※ 본 칼럼은 반도체/ICT에 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외부 전문가 칼럼으로, SK하이닉스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 /ahn-eun-young-a-public-health-teacher/feed/ 0 영화 [반도]에는 강동원보다 더한 ‘비주얼 쇼크’가 있다?_한국 영화 속 CG 기술의 진화 /cg-technology-in-movies/ /cg-technology-in-movies/#respond Mon, 17 Aug 2020 20:00:00 +0000 http://localhost:8080/cg-technology-in-movies/ 에서 좀비가 창궐한 열차 안 모습을 실감 나게 그려냈다. 특히 승무원이 좀비로 변해가는 모습이나, 구조 활동을 나온 군인들이 좀비로 변해 기차역 안의 민간인들을 덮치는 장면은 다시 봐도 오싹하다.]]> 대한민국이 멸망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연상호 감독은 영화 <부산행>에서 좀비가 창궐한 열차 안 모습을 실감 나게 그려냈다. 특히 승무원이 좀비로 변해가는 모습이나, 구조 활동을 나온 군인들이 좀비로 변해 기차역 안의 민간인들을 덮치는 장면은 다시 봐도 오싹하다. <부산행>이 끝난 이후의 한국은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했다. 감독도 관객의 마음을 알았는지 <부산행>의 세계관을 이어, 4년 후 달라진 한국의 모습을 영화 <반도>에 담았다.

배경은 공유하지만, 주인공은 다르다. 반도의 주인공은 좀비 사태 당시 운 좋게 홍콩으로 피난을 간 한정석(강동원 분)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은 지도 위에서 사라졌다. 당시 피난을 갔던 사람들은 차별받으며 어렵게 살아간다. 이런 이들에게 범죄조직이 다가와 한 가지 제안을 한다. 한국 오목교에 2,000만 달러가 들어 있는 트럭을 가져오는데 문제가 생겼으니, 이를 가져오면 돈의 절반을 나눠주겠다고. 거부할 수 없는 조건에 몰래 한국에 숨어 들어간 이들이 마주한 것은 원자폭탄이라도 맞은 듯 황폐해진 서울이었다.

“100% CG로 만들었습니다”

영화 속 서울은 말 그대로 ‘박살’나 있다. 황량해진 인천항과 고가도로에서 망가진 채로 버려진 차들, 유리가 다 깨진 채 방치된 고층 빌딩, 무너진 새빛둥둥섬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풍경이 폐허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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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도> 스틸 이미지(사진제공 : NEW)

어떻게 이런 장면을 찍을 수 있었을까? 답은 모두가 알고 있듯이 바로 ‘컴퓨터 그래픽(Computer Graphic, 이하 CG)’이다. 이제는 CG를 안 쓰는 영화가 없을 정도로 대중적이지만, <반도>에서는 특히 CG를 많이 사용했다. 연상호 감독이 온라인으로 열린 제작보고회에서 이번 영화는 CG로 ‘떡칠’을 했다고 말했을 정도다.

감독이 이 같은 발언을 한 이유가 있다. 일반적으로 영화 한 편은 1,500~2,500컷으로 구성된다. <반도>에는 2,300여 컷이 쓰였으며, 그 가운데 CG가 사용된 컷은 1,270컷 정도다. 절반 이상을 CG가 쓰인 컷으로 채운 셈이다.

현재는 CG를 절반 가까이 사용할 만큼 기술이 발전했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못했다. 1993년에 개봉한 영화 <그 섬에 가고 싶다>는 한국에서 가장 먼저 CG를 이용한 영화. 이 영화에는 1분 30초 분량의 짧은 특수효과 장면만이 담겼다. 그로부터 1년 후 개봉한 영화 <구미호>는 10분 정도의 CG 장면을 담았고, 덕분에 본격적인 한국 최초의 CG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CG 기술이 널리 보급되면서 CG를 사용하는 방법도 달라졌다. 원래 영화에서는 CG가 시각 효과(VFX, Visual Effect)를 얻는 데 사용됐다. 상상은 할 수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장면을 찍기 위했던 것. 사람이 유령을 통과하고, 귀신이 벽에서 등장하는 장면을 CG로 쓴 영화 <은행나무 침대>가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CG는 점점 특수효과(SFX, Special Effect)를 위해 사용되기 시작했다. 영화 <쉬리>의 도심 폭파 장면이나 <해운대>의 쓰나미 장면, <타워>의 화재 장면, <백두산>의 화산폭발 장면 등이 그 예다.

한국 영화 속 CG 기술의 진화를 확인하다

<반도>에서는 ‘Full CG(실제 촬영 없이 컴퓨터 그래픽으로만 만든 이미지)’ 장면도 유심히 봐야 한다. 몇 번의 소동 끝에 마침내 돈이 담긴 트럭을 찾은 한정석 일행은 원래는 시민들을 구출하는 부대였지만 인간성을 상실한 631부대로 인해 죽음의 고비에 몰리게 된다.

홀로 살아남은 한정석은 다른 생존자 그룹 민정(이정현 분)의 가족인 준(이레 분)과 유진(이예원 분)에게 구조된다. 이때 준이 선보이는 신기에 가까운 운전 기술과 자동차 추격 장면은 100% CG다. 실제 도시를 스캔해서 3D 모델로 만들고, 차량과 건물, 주변 사물 역시 모두 3D 모델로 만든 다음, 도시 배경에 배치해서 한땀 한땀 영상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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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도> 스틸 이미지(사진제공 : NEW)

<반도>에는 이러한 Full CG 영상이 많이 들어갔다. 대규모 군중 신의 좀비와 차량 추격전 장면 모두 Full CG라고 봐도 무방하다. 예전에도 한국 영화에서 Full CG 영상이 사용된 사례가 없지는 않았지만, 액션 장면 전체를 이렇게 처리한 경우는 드물었다. 실사 영화에서 전체 액션 장면을 CG로 만들면 위화감 즉, CG 티가 많이 날 수 있기 때문. 이러한 경우 관객의 몰입감을 확 떨어뜨릴 수 있다.

이런 위험을 감수하고 Full CG 장면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감독의 결단이다. 영상에 많은 요소들을 3D 모델링해 집어넣으면 CG 퀄리티는 좋아질 수 있다. 다만 제한된 기간 안에 그걸 영상으로 만들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다. 해상도가 높고 표현되는 요소가 많으면 영상 작업에 걸리는 시간은 길어지고, 제때 결과를 내놓지 못하게 된다. 영화는 주어진 예산과 기간 안에 만들기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연상호 감독은 결단을 내렸다.

그의 결단을 뒷받침한 것은 컴퓨터 성능이다. 영화 CG는 예나 지금이나 강력한 컴퓨터 성능을 요구하는 분야다. 컴퓨터 성능을 좌우하는 요소는 CPU(Central Processing Unit, 중앙처리장치) 중심에 있는 ‘코어(Core)’다. 이곳에서 컴퓨터의 모든 연산이 이뤄지기 때문에, 코어가 많이 탑재될수록 성능은 좋아진다. 그래서 세계적인 CG 스튜디오에서는 수십 만개의 코어가 내재된 최고급 슈퍼컴퓨터를 사용할 정도. 이번 <반도>를 제작할 때는 40개의 코어를 가진 400대의 컴퓨터를 사용했다. 이 컴퓨터들을 묶어서 렌더 팜(Render Farm, 영화에 사용하는 CG를 생성하기 위해 여러 대의 컴퓨터를 이용해 컴퓨터 클러스터를 구성한 것)을 만들고, 5만 6,282fps(프레임)를 뽑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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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과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을까? 영상 마지막 작업을 책임지는 렌더링(Rendering, 2차원 혹은 3차원 데이터를 사람이 인지 가능한 영상으로 변환하는 과정) 작업은 아직까지 CPU 성능에 크게 의존한다. 1992년에 출시돼 당시 할리우드 영화 CG 작업에 널리 쓰이던 실리콘 그래픽스의 ‘인디고2 워크스테이션’ CPU 성능은 300MFlops¹(메가플롭스, 1초당 100만 번의 연산이 가능한 속도)다. 2019년 출시된 인텔 제온 시리즈의 ‘플래티넘 8280M’ CPU 같은 제품은 성능이 1992년 대비 5,376배 증가한 1612.8GFlops(기가플롭스, 1초당 10억 번의 연산이 가능한 속도)에 달한다. 2010년대 중반부터는 클라우드 팜(영화에 사용하는 CG를 생성하기 위해 클라우드 컴퓨팅 체계 형태로 운용하는 것)을 쓰는 회사도 있고, GPU 성능이 좋아지고 렌더링 소프트웨어가 GPU 렌더링을 지원하면서, GPU 렌더 팜(GPU 기반의 컴퓨터 클러스트 구성)을 쓰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1) Flops(플롭스) : 초당 수행할 수 있는 부동소수점 연산의 횟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컴퓨터의 연산속도를 나타내는 척도.

감쪽같이 자연스러운 연출, 튀지 않는 부분도 모두 CG다?

폐허가 된 서울, 차량 추격전 장면 만큼이나 눈길을 끈 CG 장면이 또 있다. 탈출을 위해 주인공과 민정 가족은 631부대 아지트에 잠입하기로 한다. 달러가 들어있는 트럭을 되찾아 인천항에서 기다리고 있는 중국 범죄 조직에 돌아가기 위해서다. 이때 일군의 좀비 행렬이 631부대 쪽으로 향한다. 탈출하는 자동차 앞을 막아서는 좀비 행렬. 이 수많은 좀비도 당연히 CG다. 영상에서 알아서 움직이는 이런 캐릭터를 ‘디지털 배우’(3D 컴퓨터 그래픽스 기술로 실제 배우처럼 작동하도록 만든 가상의 배우)라고 부른다.

한국 영화에서 디지털 배우는 익숙한 존재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는 디지털 캐릭터를 이용해 10만 명의 중공군이 몰려오는 모습을 연출했다. 영화 <중천>에서도 디지털 배우가 등장한다. 이후 영화 <디워>의 이무기, <미스터고>의 고릴라, <대호>의 호랑이 등 가상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이런 기술은 <반도>에도 이어져, 대규모의 좀비들이 떼지어 움직이고 연기한다. 탈출 장면에서 차량 위로 쏟아지는 좀비 떼는 이 영화의 백미다.

<반도>에서는 80% 이상의 공간이 CG로 만들어졌다. 밤에는 좀비가 잘 활동하지 않는다고 설정한 탓에 등장인물들은 밤에 활동하는 신이 많다. 이 장면들도 대부분 CG 처리를 했다. 낮에 찍은 다음, 밤처럼 보이게 만든 것.

기술에서 디지털 가상 스튜디오까지, 기술 시대에 만날 새로운 영화

자연스러운 CG 처리 만큼 영화 제작 환경도 속도감 있게 바뀌고 있다. 디즈니 플러스에서 방영돼 인기를 끈 SF 드라마 <더 만달로리안>은 디지털 가상 스튜디오에서 제작됐다. 그린 스크린 앞에서 실사를 찍고 컴퓨터로 배경을 합성한 것이 아니라, 아예 배경 영상을 세트장에 비추고, 그 앞에서 바로 영상을 찍는 방법이다. 이는 추후에 합성할 필요가 없어 제작비용과 시간이 단축되고, 연기자는 실감나는 배경 덕분에 연기하기에 더 자연스럽다고 한다.

일본 기업 에이벡스 테크놀로지스와 엑시비가 공동 개발한 애니메이션 제작 툴 ‘Anicast Maker’도 주목할 만하다. 이는 VR 공간에서 연기해 가상의 캐릭터로 연출되는 것을 토대로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는 소프트웨어이다.

이처럼 CG기술과 디지털 가상 스튜디오의 발전은 계속되고 있지만, 아직 한국 영화 CG에 대해 아쉬움을 표현하는 사람이 많다. 주로 할리우드 영화보다 못하다는 평가지만, CG 제작에 들이는 비용을 비교하면 이만큼의 퀄리티를 구현한 것도 대단한 일이다.

영화 CG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도 컴퓨터도 뼈가 빠질 정도로 일해야 하는 노동과 컴퓨팅이 집약된 분야다. 반도체 기술이 대단히 빠르게 발전하긴 했지만, 관객의 눈높이는 더 빠르게 높아졌다. 영화 제작 관계자들은 아무리 컴퓨터가 좋아져도 표현해야 할 것이 점점 많아져 영화를 한 편 제작할 때마다 ‘한계에 도전하는 느낌’이라고 어려움을 토로한다.

이처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한국 영화 CG는 빠르게 성장해 왔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과 <설국열차>는 해외 팀의 도움을 받아 CG 작업을 했지만, <기생충>에선 한국 덱스터 스튜디오의 역량으로 CG를 처리할 수 있었다. 일부 영역에서는 이제 다른 나라 부럽지 않은 실력을 갖췄다.

기술이 좋아지면 그만큼 표현할 수 있는 게 많아진다. 반도체 기술이 성장하는 만큼, 제작 환경 변화와 함께, 더 적은 비용으로 더 빠르게 CG를 만들 수 있게 된다. 그때가 되면, 우린 또 어떤 멋진 영화를 만나게 될까?

※ 본 칼럼은 반도체/ICT에 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외부 전문가 칼럼으로, SK하이닉스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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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인간수업], 틀린 답이 던진 기술윤리학 /technical-ethics/ /technical-ethics/#respond Thu, 11 Jun 2020 20:00:00 +0000 http://localhost:8080/technical-ethics/ 은 2020년 4월 넷플릭스에 공개된 10부작 드라마다. 한국에선 보기 힘든 자극적인 소재로 입소문을 탔다. 미성년자가 알선하는 미성년자의 성매매. 사회면 뉴스에서는 가끔 보여도, 영화나 드라마 소재로 쓰기엔 너무 자극적이다.]]> 도비라.jpg

▲ <인간수업> 캐릭터 포스터(사진제공 : 넷플릭스)

<인간수업>은 2020년 4월 넷플릭스에 공개된 10부작 드라마다. 한국에선 보기 힘든 자극적인 소재로 입소문을 탔다. 미성년자가 알선하는 미성년자의 성매매. 사회면 뉴스에서는 가끔 보여도, 영화나 드라마 소재로 쓰기엔 너무 자극적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청소년의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청소년 관람 불가 딱지를 달았다. 소재는 자극적이지만, 인간수업은 컴퓨터와 인터넷이 갖춰진 세상에서 스마트폰 앱으로 매개되는 사람 사이의 관계와 그 관계 속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기술은 때때로 반대로 이용된다

주인공 오지수(김동희 분)는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다. 학교에서는 조용하고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지만, 알고 보면 스마트폰 앱을 만들어 조건 만남을 주선하고 있다. 그러던 중 잘 진행되던 사업에 지수가 짝사랑하던 배규리(박주현 분)가 끼어든다. 부자지만 자신을 숨 막히게 옭아매는 집에서 탈출하고 싶었던 규리는 지수의 사업을 확장해 돈을 더 벌고 싶어 한다. 그렇게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깡패들과 엮이게 되고, 갖은 위기를 겪으며 이야기는 비극으로 치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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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수업> 메인 예고편 영상 캡처.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GPS(Global Positioning System)를 통해 사용자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다.

지수가 조건만남을 주선하기 위해 쓰는 것은 강아지가 그려진 채팅 앱이다. 중학생 때, 그의 양친이 집을 나간 이후 유튜브로 코딩하는 법을 독학해 직접 앱을 만들었다. 앱으로 요청이 들어오면 젊은 여성과 매칭을 해주고, 만약 그 여성에게 위험한 일이 생기면 위치 추적 기능을 이용해 경호 서비스를 제공한다.
지수가 이런 앱을 만든 이유와 손님을 모으는 모습은 상세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이미 시청자들이 알고 있듯이, 우리의 현실에서 벌어지는 상황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런 사업은 콘텐츠만 다를 뿐 보편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전형적인 플랫폼 서비스다.

플랫폼 서비스는 초기 온라인 상거래 모델인 오픈마켓이 성공하면서 자리 잡은 비즈니스 모델. 서비스 업체는 판매자와 구매자를 연결하는 플랫폼을 제공하고, 거래가 성사될 경우 판매자, 또는 양쪽에서 수수료를 받는다. 차량 공유 서비스 우버(Uber)나 숙소 공유 서비스 에어비앤비(Airbnb)와 같은 공유 경제 사업에서도 일반적으로 쓰인다.

이런 비즈니스 모델이 좋은 콘텐츠만을 위해 사용되면 좋겠지만, 때때로 기술은 반대로 이용당한다. 자유로운 의견 표현을 위해 지켜냈던 인터넷 익명성은, 악행을 숨기는 도구가 된 것처럼 말이다. 누구나 쉽게 코딩을 배워 앱을 만드는 유튜브 무료 강의는, 범죄의 매개체가 되는 앱을 만드는 교과서가 된다. 음성 인식 및 음성 합성 기술은 범인이 숨기 좋은 가면으로 사용된다. 지리 정보를 활용하기 위해 개방된 위치 정보는 누군가를 추적하기 위해 이용되기도 한다. 기술은 사람이 쓰는 도구일 뿐, 사람이 악의를 위해 쓰겠다면 막을 방법이 없다.

기술은 사람이 움직이는 모습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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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수업> 메인 예고편 영상 캡처

인터넷 초창기 시절엔 이런 플랫폼 서비스의 장점이 더 부각됐다. 시공간의 제약을 없앤 네트워크 기술을 이용해, 생산자와 소비자간 직거래가 가능해졌기 때문. 오픈마켓 서비스도 처음엔 경매를 통한 개인 중고 물건 판매 서비스로 시작해, 지금의 단계에 이르렀다. 하지만 비대면 거래가 활성화되자 신뢰 문제가 불거졌고, 사기를 치는 사람이 많아졌다. 결국 플랫폼 업체는 거래대금을 임시 보관하는 기능을 만들었고, 소비자를 위해 리뷰와 별점을 매기는 시스템도 만들었다.

지수도 거래자들이 서로 신뢰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었다. 지수가 고용한 이 실장(최민수 분)은 전직 군인이자 노숙자이고, 실제 종사자들을 경호를 제공하는 사람이자 조건 만남을 뛰는 사람들의 보험이다. 사업에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하는 존재로 마치 플랫폼의 고객 서비스인 에스크로서비스(escrow service, 구매자의 결제대금을 제 3자에게 예치하고 있다가 배송이 정상적으로 완료된 후 대금을 판매자에게 지급하는 거래안전장치)와 같은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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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대면으로 이뤄지는 인터넷 상거래는 신뢰 문제를 일으켰다. 이로 인해 플랫폼 서비스는 별점 시스템을 도입해 소비자들을 안심시켰다.

아이러니하게도 익명성 뒤에 숨은 사람들은 남에게 보여주기 싫은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는 한다. 가면을 벗기 위해 가면을 쓰는 셈이다. 그렇기에 신뢰가 없는 사이에서 이뤄지는 거래일수록 항상 신뢰할 수 있는 ‘근거’가 필요하다. 리뷰나 별점이 바로 그 근거의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드라마에 나오지 않아도 구매자가 조건 만남 대상을 어떤 식으로든 평가하고 있을 것이라고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이처럼 기술을 이용하는 모습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인간수업>에서는 기술로 매개되는 사람들과의 관계도 여실히 드러난다. 이야기 중간에 지수가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자, 일하던 여성들은 단체 채팅방에서 나간다. 채팅방에 들어오면 관계가 형성되고, 나가면 끊어진다. 그렇게 우리는 메신저 하나로 사람과 관계를 맺기도 하고 왕따를 시킬 수도 있다.

기술이 우리를 나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기술이 우리를 나쁘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최근 불거진 N번방 사건에서 놀랐던 것은, 많은 사람이 채팅창이나 동영상 너머에 있는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이 돈을 주고 콘텐츠를 사고 있다고 여겼고, 무료로 콘텐츠를 얻기 위해 방장이 원하는 작업을 했다.

많은 사람이 분노했지만, 사실 그들의 행동은 기존 아프리카 TV BJ(Broadcasting Jockey)나 유튜버를 대하는 시청자의 행동패턴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돈을 주고, 카메라 너머 저편에 있는 어떤 이의 행동을 후원 제도를 통해 ‘산다’. 또한 그러한 행동에 리뷰와 별점을 매기며 우월한 지위에 있는 기분도 맛볼 수 있다. 그들에게 후원할 때,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실제 관계에서는 내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관계가 달라지지만, 거래 관계는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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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술이 우리를 나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악의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의 문제다

지수는 이 사업이 들킬까 계속 불안감에 시달린다. 중간에 멈출 기회는 몇 번이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명문대에 가 좋은 직장을 얻고 따뜻한 가족을 만드는 평범한 삶을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수의 꿈 속에는 계속 아버지나 선생님 같은 어른이 나타나고, 지수는 그들에게 ‘이것이 수행평가에 반영되느냐’고 묻는다. 이는 지수 역시 리뷰, 별점이나 다름없는 수행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지수도 자신들이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사회에서 살아남고 싶다는 삐뚤어진 간절함이 도덕적인 경계선을 넘도록 부추겼고, 그 부추김에 넘어갔을 뿐이다. 지수처럼 우리는 기술을 알고 쓴다. 해도 되는 일과 하면 안 되는 일도 생각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기술이 우리를 나쁘게 만들었다”고 말한다면 핑계다. 알면서 나쁜 짓을 했으니,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다. 기술은 핑계가 될 수 없다.

생각의 방향에 따라 기술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다

기술은 언제나 양날의 칼이다. 뭔가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지만, 어떻게 기술을 쓰며 살지는 스스로 택해야 한다. 지수처럼 특정 앱을 쉽게 만들 정도의 실력이 있다면, 당장은 큰돈을 못 벌어도 더 밝은 미래를 선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기술을 사용하는 생각의 방향이 바뀌면 다른 미래가 찾아온다. 그렇기에 기술은 차려놓은 밥상이 아니라, 다른 미래를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드는 힘이다. 반도체도, 컴퓨터도, 인터넷도, 로봇도 모두 그런 길을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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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수업> 보도스틸컷(사진제공 : 넷플릭스)

만약 지수가 자신의 실력으로 다른 것을 중계했었다면 어땠을까? 초능력자를 중계했다면 SF 액션 드라마가, 과외선생님을 중계했다면 SKY캐슬이, 고등학생 프로그래머를 모았다면 벤처 성공 드라마가 됐을지도 모른다. 슬프게도 드라마 속 어른들은 그러지 못했지만, <인간수업>의 제목처럼 제대로 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기술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윤리 수업’을 해줄 어른이 필요하다.

※ 본 칼럼은 반도체/ICT에 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외부 전문가 칼럼으로, SK하이닉스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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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몰랐던 게임의 역사, 그리고 게임 속 반도체 이야기(feat. Tenacity Syndrome 4편) /game-history-semiconductor/ /game-history-semiconductor/#respond Thu, 07 May 2020 20:00:00 +0000 http://localhost:8080/game-history-semiconductor/ 썸네일 a-1.jpg

“그들의 긴장된 자세에서 그 애들이 얼마만큼 게임에 빠져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화면에서 나온 빛이 아이들의 눈으로 들어가고, 신경세포들을 통해 몸을 타고 흐르면서 전자들이 비디오 게임을 통해 움직이는 듯한, 말하자면 마치 피드백 폐쇄회로 같았다. 그 애들은 분명히 게임이 투영되는 공간의 사실성을 믿고 있었다. 볼 수는 없지만, 분명히 있다고 믿어지는 세계를.”

– SF 소설가, 윌리엄 깁슨

게임의 역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오래됐다. 기원전 1323년 사망한 고대 이집트 왕 투탕카멘의 무덤에서도 주사위와 보드게임이 발견됐을 정도. 인류가 문명을 만든 이후 ‘놀지 않고’ 산 적이 드물다는 얘기다. 이는 전자오락 시대만 살펴봐도 마찬가지. 최초의 비디오 게임은 1958년 물리학자 윌리엄 히긴보덤(William Higinbotham)이 자신의 연구소 방문객을 위해 만들었다. 오실로스코프와 아날로그 컴퓨터로 만든 아주 간단한 게임이었지만, 방문객이 줄 서서 기다릴 만큼 인기가 높았다고. 미국에 대형 컴퓨터가 널리 보급된 시기가 1960년대니, 컴퓨터가 보급되기 전에 게임이 먼저 만들어진 셈이다.

이처럼 인류와 역사를 같이하는 게임이지만, 대접은 박하다. 아니, 세상은 게임을 싫어한다. 게임에 몰입하는 탓에 생산적인 활동, 즉 공부나 일을 할 시간을 낭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 오죽하면 세계보건기구(WHO)가 국제질병분류체계에 ‘게임 사용 장애(Gaming Disorder)’를 포함했을까. WHO까지 가지 않더라도 ‘게임 한다’고 하면 좋은 소리 듣기는 힘들다. 소개팅 나온 상대에겐 이상한 눈초리를 받고, 사회에서는 아직 덜 큰 어른 취급을 받기 일쑤. 10세에서 65세 사이의 한국인 10명 중 7명 이상이 게임을 하는데도 말이다*.

* 2018 게임이용자 실태조사

하지만, 게임이 정말 그렇게 나쁘기만 한 걸까? SK하이닉스가 최근 공개한 Tenacity Syndrome 4편 속 주인공, ‘게임을 사랑한 소년’ 한희수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몰랐던 게임의 역사를 알아보자.

콘솔 게임: 게임 키즈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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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Tenacity Syndrome 4편 영상 캡처

여기, 한 소년이 있다. 집념 증후군(Tenacity Syndrome)에 걸린 이 소년의 이름은 ‘한희수’. 친구들과 함께 콘솔 게임(Console Game)*을 즐긴다. 저 당시 콘솔 기기 중에서는 플레이스테이션2(Play Station 2, PS2)가 가장 유명하다. PS2는 1970년대 아타리 게임기, 1980년대 패미컴 게임기, 1990년대 슈퍼 패미컴과 플레이스테이션1의 시대를 거쳐 21세기 초반 세계를 장악한 게임기 모델. 한국에는 2002년에 정식 출시됐다.

* 콘솔 게임(Console Game): TV에 연결해서 즐기는 비디오 게임(video game)

PS2는 64bit CPU와 32MB 메인 메모리, DVD 드라이브를 장착하고 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말도 안되게 낮은 사양이지만, 당시에는 무려 1억 5,768만대나 팔렸다. 희수가 친구와 가장 많이 즐긴 게임은 아마도 ‘철권 4’나 축구 게임인 ‘위닝 일레븐 7’일 확률이 높다. 모두 PS2 발매 당시 가장 큰 인기를 끌었던 게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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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Tenacity Syndrome 4편 영상 캡처

어라? 이제 보니 희수는 수업 중에도 게임을 즐기는 것 같다. 이럴 때 즐기기 좋은 휴대용 게임기로는 역시 2004년에 나온 닌텐도 DS 또는 2007년 한국에서 정식 발매된 닌텐도 DS Lite가 제격. 67MHz의 속도를 가진 32bit CPU와 4MB SRAM 사양을 가진 게임기다. 아니면 소니에서 나온 PSP(Play Station Portable)였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기준으로 본다면 역시 다소 아쉬운 스펙이긴 하지만, 닌텐도 DS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하드웨어 사양을 가진 PSP는 당시 게이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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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게임기의 성능이 재미와 꼭 정비례하지는 않는 법. 1976년에 나와 히트한 마텔(Mattel)사의 휴대용 게임기인 ‘풋볼’은 지금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USIM 칩보다도 성능이 낮았지만, 그 인기는 지금 출시되는 웬만한 게임에 뒤지지 않는다.

모바일&온라인 게임: 혼자 말고 여럿이 함께하는 ‘멀티 모드’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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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수의 게임 라이프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중학생 시절에는 핸드폰 게임을, 고등학교 입학 후에는 PC 게임을 즐기기 시작한다. 특히 희수가 수험생이었던 2010년대 초반은 ‘스타크래프트2’, ‘디아블로3’, ‘문명5’ 등 한 번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는 무시무시한 PC 게임 명작들이 쏟아지던 시기. 역할수행게임(RPG)*의 고전으로 불리는 ‘디아블로’나, 최초로 실시간 전략게임(RTS)*을 도입해 수많은 팬덤을 형성한 ‘스타크래프트’ 시리즈는 한국의 e스포츠 시장을 견인하며 ‘PC방 신드롬’을 이끌었다.

* 역할수행게임(RPG): ‘Role Playing Game’의 약자. 유저가 가상의 세계관 속 캐릭터가 돼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방식의 게임을 말한다.
* 실시간 전략게임(RTS): ‘Real-Time Strategy’의 약자. 실시간으로 자원을 채취해 건물을 짓거나 병력을 생산하고, 이를 활용해 문명을 발전시키거나 전쟁에서 승리하면 끝나는 형태의 전략 게임을 말한다.

이 게임들의 공통점은 바로 팀이 필요한 ‘멀티 모드’가 핵심 콘텐츠라는 것이다. 예전에도 이런 게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2010년대에 나온 게임들은 특히나 다른 사용자들과 함께 즐기는 멀티 모드에 더욱 초점이 맞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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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양의 통신 데이터를 처리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모뎀 반도체 칩

이처럼 여러 유저가 네트워크를 연결해 실시간으로 함께 게임을 즐길 수 있게 된 건 PC나 스마트폰 등 하드웨어 기기에 탑재돼 대규모의 통신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해주는 모뎀 반도체 칩이 발전한 덕분.

1990년대 후반 초고속 인터넷 환경을 제공하는 ADSL* 칩이 개발되지 않았다면 스타크래프트와 함께 일세를 풍미한 PC방 신드롬도 없었을 것이고, 이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같은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이나 ‘리그 오브 레전드’ 같은 팀대항온라인게임(AOS)*도 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 ADSL: ‘Asymmetric Digital Subscriber Line’의 약자. 별도의 회선 설치 없이 전화선을 이용해 컴퓨터의 고속 데이터 통신을 지원하는 통신수단. 통신 속도를 크게 단축해 1990년대 국내 인터넷 붐을 일으켰다.
*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 ‘Massive Multiplayer Online Role Playing Game’의 약자. RPG 게임의 일종으로, 네트워크로 연결된 여러 플레이어가 동시에 같은 가상의 세계에 참여해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방식의 게임을 말한다.
* 팀대항온라인게임(AOS): ‘Aeon of Strife’의 약자. 유저 제작 변형(Game Modification) 방식을 통해 RTS, RPG 등의 요소를 복합적으로 결합한 온라인 게임을 말한다. 라이엇 게임즈(Riot Games)의 ‘리그 오브 레전드(LoL)’가 대표적.

VR 게임: ‘사회적 거리 두기’ 시대의 새로운 소통 창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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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Tenacity Syndrome 4편 영상 캡처

이제 게임은 단순히 재미를 위한 오락이나 학습 수단을 넘어, 사회 문제 해결에 기여하고 사람들 사이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일종의 연결고리가 되어가고 있다. 실제로 최근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으로 인한 사회적 거리 두기 운동이 확산하면서 일상 속 게임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고 있다. 가상현실(VR)이나 증강현실(AR) 기술을 활용한 게임이 집에만 있는 사람들의 답답함을 해소해주고 있는 것.

모험 시나리오를 활용한 재미있는 운동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홈 트레이닝 게임 ‘링 피트’, 실제 여행을 떠난 듯한 착각을 느낄 만큼 실감 나는 체험 영상을 제공하는 가상 여행 플랫폼 ‘구글 어스’가 대표적이다. 그뿐만 아니라 단백질 구조를 변경하는 퍼즐게임 ‘폴드 잇(Fold it)’은 코로나19의 치료약을 찾는 유저 참여형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이런 변화를 의식했는지, 게임 중독을 질병으로 규정했던 WHO마저 입장을 바꾸었다. 효과적인 사회적 거리 두기를 위해 사람들에게 집에서 게임을 하자고 권하기 시작한 것. VR 게임이 본격적으로 상용화되면, 비대면 소통이 더욱 중요해질 미래 사회에서 게임의 역할 역시 지금보다 훨씬 확대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러한 진화가 가능한 것은 작은 게임기 안에 더 많은 세계를 압축해 구현하는 반도체 기술의 눈부신 발전 덕분. 각각의 기기들을 연결해주는 네트워크 역시 반도체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고용량 D램 메모리는 물론, 가상현실(VR) 구현에 필수적인 시스템 반도체가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학습과 협업의 능력, 게임의 진화가 우리에게 남긴 것

오랜 시간 사람들의 일과를 방해하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아온 게임.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바뀌어 게임의 순기능도 다시 조명받고 있다. 그중 하나가 학습 능력. 게임은 재미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뭔가를 훈련하는 과정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게임에서 초보자가 가장 먼저 경험하는 것은 죽는 것이다. 게이머들은 죽고 다시 시작해 새로운 방식으로 도전하는 플레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해법을 찾는다. 이는 빠르게 다양한 비즈니스 모델을 시도하고 실패를 기반으로 더 나은 성장 전략을 찾아내는 ‘린 스타트업(Lean Startup)’ 전략과도 상당히 유사하다.

게임의 또 다른 순기능은 바로 ‘협업 능력’을 길러준다는 것이다. Tenacity Syndrome 4편에 등장하는 희수와 동료 하이지니어들은 학창 시절 멀티 모드 플레이 중심의 RPG, RTS 게임을 하며 자연스럽게 타인과 협업하는 능력을 습득한 ‘밀레니얼’ 세대다. 이들은 개인의 능력 발휘와 경쟁도 중요시하지만,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팀으로 뭉쳐 함께 문제를 해결할 줄 아는 ‘동료 의식’을 겸비하고 있다.

집단 지성을 도모하는 이러한 능력은 문제 해결을 향한 끈기, 즉 집념과도 연결된다. 멀티 플레이에 익숙한 게이머들은 미션이 정해지면 그에 대한 해답이 반드시 있다고 믿고 그 해법을 찾는다. 어떤 종류의 미션이건 상관없다. 목표 달성을 위해 문제를 연구하고, 이에 대응할 수 있는 팀을 꾸리기 위해 노력한다. 이렇게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쳐 한 가지 방법을 찾으면 공유하고, 다시 이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더 나은 여러 가지 방법을 계속 찾아간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이는 바로 하이지니어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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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Tenacity Syndrome 4편 영상 캡처

Tenacity Syndrome 4편 속, 각자 자신의 전문 분야를 가지고 있는 희수와 동료들은 고난도의 미션을 해결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인다. 그리고 게이머들이 서로 협력해서 미션을 클리어하듯, 치열하게 협업하며 마침내 신기술 개발에 성공한다. 천방지축 게임 키드였던 희수는 이렇게 게임을 통해 습득한 ‘집념’과 ‘끈기’로 세계를 놀라게 한 인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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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Tenacity Syndrome 4편 영상 캡처

그동안 ‘게임은 나쁜 것’이라는 편견 때문에 게임을 멀리했다면, 오늘 친구나 가족과 함께 재밌는 게임 한 판 해보는 건 어떨까. 실패를 통해 성장하고 타인과 연결되는 즐거움을 만끽하다 보면 어느새 나도 몰랐던 게임의 매력에 흠뻑 빠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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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칼럼은 반도체/ICT에 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외부 전문가 칼럼으로, SK하이닉스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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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슈퍼 히어로가 될 수 있을까? 반도체의 눈으로 바라본[저스티스 리그] /justice-league/ /justice-league/#respond Mon, 11 Dec 2017 20:00:00 +0000 http://localhost:8080/justice-league/ 는 그 상상을 실현시킨 영화죠. DC팬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꿈의 프로젝트였지만, (슬프게도) 그 시도가 아주 성공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2(3) (1).png

슈퍼 히어로들이 함께 팀을 이뤄 악당을 무찌른다는 상상은 언제나 우리를 설레게 합니다. 최근 개봉한 영화 <저스티스 리그>는 그 상상을 실현시킨 영화죠. DC팬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꿈의 프로젝트였지만, (슬프게도) 그 시도가 아주 성공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대신 반도체의 눈(?)으로 바라보면 참 흥미로운 구석이 많습니다. ‘황당무계하게 여겨지는 슈퍼 히어로의 능력, 어쩌면 실현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말입니다. 그럼 지금 바로 ‘반도체’와 함께 그 해답을 찾아보도록 하죠.

원더우먼이 가진 황금 올가미, 진실을 말하게 할 수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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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Daum영화

DCFU(DC Films Universe) 영화 중 유일하게 볼만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저스티스 리그’에서도 존재감을 마구 내뿜는 영웅, 바로 원더우먼(갤 가돗)인데요. 그는 단독 영화인 <원더우먼>은 물론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 <저스티스 리그>에서도 씬스틸러 역할을 톡톡이 해냈습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바로 ‘DC의 효녀’입니다.

원더우먼은 ‘헤스티아의 올가미’라는 독특한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진실의 올가미’라고 불리기도 하는데요. 이 무기는 한번 묶이면 진실만을 말할 수 밖에 없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헤스티아의 올가미’는 원더우먼 캐릭터를 만든 원작자 윌리엄 몰튼 마스턴(William Moulton Marston) 박사가 거짓말 탐지기를 발명했기 때문에 탄생했다는 이야기가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실 여부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과연 현실 세계에서도 진실만을 말하게 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럴 수만 있다면 정말 대단한 무기일 텐데요.

사실 진실만을 말하게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의 뇌는 굉장히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자백제라 불리는 약물이 있지만, 술 취한 상태처럼 만들어 되는대로 말하게 만드는 쪽에 더 가까운 약이죠. 대신 말하는 것이 거짓말인지 아닌지를 어느 정도 판별하는 기술은 개발되어 있습니다. 앞서 말한 윌리엄 몰튼 마스턴 박사가 발명한 거짓말 탐지기입니다.

간단히 말해 ‘의식은 자율 신경까지 콘트롤 할 수는 없다’라는 믿음 아래, 거짓으로 답할 때 나타나는 혈압, 맥박, 땀 같은 여러 가지 신체 반응을 체크해서 사람 말의 진위를 판별하는 기술입니다. 나중에는 이 조사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겨 뇌파 탐지기를 함께 사용하기도 했죠.

당연히 신체 반응과 뇌파 반응을 감지하는 것은 피의자의 몸에 붙어 있는 센서들입니다. 알아채셨나요? 바로 ‘반도체’죠. 우리가 만약 ‘진실의 올가미’를 만든다면, 이 올가미는 반도체 센서 덩어리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센서로 피의자 몸 상태를 확인하고, 내장 프로세서로 뇌파를 분석하고, 거짓말을 하면 전기를 흘려 고통을 주는 것이죠.

플래시가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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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Daum영화

영화를 보면 중간에 플래시(에즈라 밀러)가 ‘(스포일러라)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 분’의 부활을 돕기 위해 전기를 공급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의 가슴에 번개 모양이 새겨져 있어 왠지 전기를 생성하는 능력이 있을 것 같은데요. 하지만 플래시는 ‘스피드 포스’에서 힘을 얻는, 다시 말해 가장 빠르게 달릴 수 있는 영웅이랍니다.

빠르기만 하다고 전기가 생성되지는 않죠. 비밀은 플래시가 달릴 때 몸 주위에 생기는 빛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마 어디서 본 것 같은 모습이다’라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바로 ‘플라스마 방전’ 형태를 띄고 있기 때문이죠. 플라스마는 기체에 높은 온도를 가함으로써 원자들이 원자핵과 전자로 분리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만큼 빠른 속도로 움직일 때 플래시 주위를 감싸고 있는 마찰력 쿠션 안에 공기가 갇히고 고온이 발생해 플라스마 방전이 생기는 것이죠.

어려운 기술 같지만 실은 이미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형광등이나 네온 사인이 방전에 의한 플라스마 상태에서 빛을 내는 제품들이거든요. 오존 제품들도 플라스마를 이용해 만들어 집니다. 아예 태양 자체가 거대한 플라즈마 덩어리이기도 하죠. 예전에는 PDP TV를 만들 때도 쓰였고, 반도체 소자를 만들 때도 플라즈마 에싱 기술이 필수적입니다. 앞으로 만들어질 인공 태양 역시 플라스마를 이용한 핵융합 반응으로 만들어 집니다. 플라스마를 다루는 것은 미래 핵심 에너지 기술 중 하나죠.

그런 플라즈마 방전을 이용해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 분’을 깨울 정도의 전기를, 단순히 빨리 달리는 것만으로 만들어낼 수 있으니, 플래시가 정말 대단한 영웅이긴 하네요.

사이보그와 홀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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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Daum영화

<저스티스 리그>에서 사이보그(레이 피셔)는 독특한 캐릭터입니다. 사고로 인해 기계로 만들어진 몸을 갖고 있죠. 그 기계 몸을 구성하는 것은 ‘마더박스’라는 우주 신족들이 만든 마법 컴퓨터입니다.

덕분에 사이보그는 어쩔 수 없이 진화하고, 어쩔 수 없이 전세계 수많은 정보들과 접촉하며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런 정보를 처리하기 위해 그가 이용하는 것이 바로 ‘홀로그램 디스플레이’입니다. 사이보그는 이를 통해 많은 정보를 시각화해서 눈 앞에 펼쳐놓습니다. 아이언맨과 비슷해 보이기도 하는데요. 하지만 문제는 아직 이런 홀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것이죠.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홀로그램은 프로젝터에서 쏜 빛을 반사시켜 투명 스크린에 비추는 방식으로 만들어집니다. 누가 봐도 가짜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실체감이 없는 영상이죠. 최근 만들어지는 홀로그램은 빛의 간섭 효과를 이용해 공중에서 3차원 오브젝트가 떠 있는 것 같은 효과를 만들어 냅니다. 아직 기술 개발 중이긴 하지만요.

그럼 영화에서 보는 것과 비슷한 홀로그램은 만들 수 없을까요? 아직까지는 그렇습니다. 다만 위에서 말한 플라스마를 사용해 비슷하게 만들어내는 기술이 연구 중에 있습니다. 무려 공기 분자를 디스플레이 장치의 화소 역할로 사용하는 건데요. 플라스마를 사용하는 관계로, 플래시가 아닌 평범한 인간인 우리들이 사용하기엔 아직 위험합니다.

▲ 유형(有形)의 홀로그램 플라즈마 (출처: 오이아치 요이치 YouTube 채널)

극복하려는 움직임은 있습니다. 일본 쓰쿠바 대학 오치아이 요이치 교수가 이끄는 팀이 제안한 ‘페어리 라이트 프로젝트는 사람 움직임에 반응하는 3차원 홀로그래픽 시스템입니다. 영상을 만들어내는 레이저 파형을 아주 작게 줄여서, 사람이 닿아도 안전하게 만들었습니다. 1000조분의 1초 단위인 펨토초 레이저를 사용해서 가능해진 건데요. 플라스마에서 발생하는 충격파를 이용해 촉감을 느낄 수도 있다고 합니다.

누구나 슈퍼 히어로가 될 수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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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Daum영화

<저스티스 리그>에서 우리와 그나마 비슷한 인간인 배트맨(밴 애플렉)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을까요? 바로 그가 스스로 언급하기도 했던 ‘재력(Rich)’입니다. 사실 이것은 반도체가 구현할 수 없는 능력이죠.

배트맨은 그 재력으로 무기를 만듭니다. 가장 능력이 뒤떨어질 수밖에 없는 <저스티스 리그>에서, 그는 히어로 지원 및 ‘화력 덕후’로 겨우 겨우 제 몫을 합니다.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 분’이야 지구인이 아니니 논외로 하고요. 아쿠아맨(제이슨 모모아)도 물고기와 대화할 수 있고 힘도 세지만, 사실 영화에서 하는 일은 악당 부하들을 처리하는 일을 빼면 존재감이 미미합니다. 그렇게 큰 근육을 가지고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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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Daum영화

돈도 능력도 부족한 우리는 완벽한 슈퍼 히어로가 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히어로가 가진 부러웠던 능력들을, 우리는 조금씩 우리 것으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요. 예전에 잠깐 소개됐던 프로토타입 제품 가운데 미코(Mico)라는 헤드폰을 예로 들 수 있겠네요. 헤드폰에 부착된 뇌파를 읽는 센서가 우리 기분을 파악해, 지금 상황에 맞는 노래를 골라준다는 컨셉을 가진 제품이었죠.

원더우먼이 아니라 남에게 진실을 말하라 할 수는 없지만, 이처럼 최소한 내 뇌가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알게 될 날이 머지 않았습니다. 영화 속 사이보그가 직접 자기 몸을 이용해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것처럼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게 될 지도 모르죠. 플래시와는 다르지만 인공 태양을 이용해 전기를 얻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고, VR게임을 통해 배트맨과 슈퍼맨의 능력을 경험해보기도 합니다.

 

 

우리는 반도체 기술을 통해 이미 슈퍼 히어로가 되어가고 있는 셈입니다. 온갖 미사여구와 허황된 약속이 판을 치기도 하지만, 과거 영화 속에서나 나왔을 일이 하나둘씩 분명히 우리 일상에 스며들고 있습니다. 마냥 좋기만 한 걸까요? 이럴 때일수록 중요한 질문을 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옳은 일을 하고 있는가?’란 질문을요. 대답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말입니다.

 

※ 본 칼럼은 반도체/ICT에 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외부 전문가 칼럼으로, SK하이닉스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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